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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륜지역에서 김일성의 활동과 노래 조선의 별 진실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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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혁명역사 강좌 4)

1. 김일성의 카륜일대에서의 활동

지난 시간까지는 김일성 역사 중에서 그의 혁명적 가정과 초기 혁명 활동 첫 부문에 대해 보았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1929-30년, 김일성이 길림감옥에 갇히었던 전후한 활동을 보았습니다.
북한 역사 위정자들은 김일성이 이 시기 이통현 고유수, 회덕현 오가자. 장춘현 카륜 일대를 전전하면서 앞을로 진행하게 될 항일무장투쟁의 조직 사상적 준비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혁, 차광수, 최창걸, 등은 마침내 김일성의 비범한 영도력과 인간애에 끌려 충성을 맹세하였고 1930년 6월에는 장춘현 카륜에서 반제 청년동맹원들이 모여 혁명의 진로에 대한 회의를 열었다고 했습니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은 불후의 고전적 연설 “조선혁명의 진로”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휘황찬란한 혁명역사라고 해야 하겠지요.
하지만 지난 시간에도 보았지만 사실 이 시기 김일성은 그렇게 비범한 존재도 탁월한 존재도 못 되었습니다.
당시 고유수, 오가자, 카륜 일대를 전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그가 어떤 혁명의 중심인물이 되어 오간 것이 아니라 국민부 산하 길강지구 혁명군사령이었던 이종락의 부하로 오간 것뿐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종락이도 사실은 조선민족주의자 단체 국민부 산하에 몸을 담고 있기는 했지만 보다는 엠엘계 공산주의에 더 가까웠으니 정확히 그의 정치적 색깔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는 불분명하다고 보아야 옳을 것 같습니다.
하여간 이종락이 당시 이 길강지구 혁명군 사령이라고는 하였지만 사실은 그가 데리고 다닌 대원은 2-30명 정도였습니다.
여기서도 사령은 이종락이고 정치부 책임자는 안붕, 군사부 책임자는 김광렬, 비서부 책임자는 최창걸, 선전부 책임자는 김원근으로 김일성은 이름도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후일 김정일이 늘 김일성에게 끝없이 충실했다고 하던 청년공산주의자들 전부가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차광수며 김혁이며 최창걸 등 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들도 엠엘계 공산주의자들로 바로 이종락의 밑에 있었던 것이지 결코 김일성의 밑에 있었던 사람들은 아닙니다.
더구나 여기서 김혁이는 본명이 김근혁이라는 사람인데 처음에는 화요계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조선공산당 사건에까지 개입되었던 사람이고 차광수는 엠엘계로 그도 김일성이 보다 선배라도 한참 선배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들이 당년 20세도 안된 김일성에게 충성했다는 것은 어떻게 보아도 믿기 어렵고 그보다는 오히려 김일성이 그들을 따라다니며 그들이 시키는 일들을 하느라 열성을 부렸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오늘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마치 이때 이 일대에서 큰 활동이나 한 것처럼 하고 있으며 그 구체적인 실례로 당시 초기 공산주의자들이 불렀다는 “조선의 별”이라는 노래를 들고 있습니다.

2. 혁명송가 “조선의 별”에 깃든 이야기

1980년대 초라고 하면 김일성이 아직 최고 권력을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이미 실제적 권력은 김정일의 손에 넘어간 다음입니다.
어느 날 김정일이 당중앙위원회 선전부 제일부부장이었던 이 아무개라는 사람을 불렀습니다.
“여 동무도 알겠지? 우리 초기 공산주의자들이 얼마나 위대한 수령님께 충실했는지 말이야?”
“예 그...그야 물론...” 제일 부부장은 최고 권력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몰라 뒷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보라구, 당시 그 초기 공산주의자들 속에는 김혁이 같은 우수한 혁명시인도 있었는데 수령님을 흠모하는 노래 한 곡 없었다는 게 말이 돼?”
“예? 그...그건...” 제일 부부장은 너무나도 뜻밖의 일이어 입이 완전히 얼고 말았습니다.
“찾아보라구, 그런 걸 발굴해 내라고 선전부도 있는 것이지 밥이나 축내라고 그런 자리가 있는 줄 알아?”
“아...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제일부부장은 얼굴이 까맣게 되어 나왔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중앙방송위원회에서는 두 번째 가라고 하면 섭섭하다고 할 작곡가, 작가 두 사람이 개천군 어느 리로 출장길에 올랐습니다.
과제인즉 1930년대 초 바로 그 카륜인가 하는 곳에서 한 때 살았던 적이 있다는 웬 노인네를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이른바 당시 초기공산주의자들이 불렀을 수 있는 “조선의 한별” 김일성을 흠모하여 불렀던 노래를 발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찾고 보니 그는 이미 90에 가까운 노인네였습니다.
귀가 간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제대로 보지조차 못하는 늙은이였습니다.
그런 노래가 있었는지는 고사하고 김일성이 그 중에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할망구였습니다.
그러니 어찌한단 말입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무조건 “발굴”해 가지고 올라가야지 그렇지 못하면 자신들의 정치적 생명까지 왔다 갔다 할 일인데 말입니다.
그로부터 한 달 가까이 그 두 사람 즉 북한 조선중앙방송에서 내려간 최고 작가와 최고 작곡가가 들어 있은 축산반 선전 실에는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평양으로 올라오자 얼마 안 되어 나온 노래가 바로 “조선의 별”이라는 노래입니다.
조선의 밤하늘에 새별이 솟아
3천이 강산을 밝게도 비치네
짖밟힌 조선에 동은 트리라
이천만 우리 동포 새별을 보네...
결국 혁명가요 “조선의 별”은 눈보라 휘몰아치는 만주 혁명투쟁의 불길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1970년대 말 김정일의 지시에 의하여 평안남도 개천군 어느 리 축산반 선전실에서 제작된 것입니다.
혁명가요“ 조선의 별”이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또 이것을 바탕으로 혁명영화 “조선의 별”이 10부작으로 나왔습니다.
영화에서는 차광수의 조언에 의해 혁명시인 김혁이 “조선의 별”이라는 노래를 만들고 이것을 알리기 위해 할빈도리에서 일제 경찰이 쳐들어오는 속에서도 노래가 적힌 전단지를 뿌리며 3층에서 떨어져 죽습니다.
얼마나 가슴 찡하게 하는 장면들입니까.
하지만 이 모두는 더 말할 것도 없이 그 위대하다는 영도자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현실은 어떻게 된 것인가.

3. 조선혁명군 길강지구 사령부의 전멸

그렇습니다. 노래나 영화는 또 그런대로 문학예술 작품이니 제 멋대로 제작할 수도 있다 합시다.
하지만 오늘 날 북한 당 역사 위정자들은 바로 이런 제 멋대로 제작한 문학예술 작품에 기초하여 혁명역사를 새로 제작한다는 데 더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북한 당 역사 위정자들은 구체적으로 김일성이 1930년
이 이종락의 혁명군 대원들을 모아놓고 “항일무장투쟁을 조직 전개할데 대하여”라는 연설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여기에는 동만에서 온 오중화나 이광까지도 참가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원래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고 했던가요.
앞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이 시기 김일성은 사실대로 말해서 김일성도 아니고 김성주입니다.
또 다시 말하지만 민족주의 단체인 조선 국민부 무장부대에서 떨어져 나온 이종락의 조선혁명군 길강지구 사령부 무슨 직책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졸병으로 따라다닌 것이 전부인데 이것을 과장해도 분수가 있지 이미 죽은 지도 수십 년도 더 된 김근혁이니 차광수 그리고 거기에다 오중화, 이광까지 끌어들여 뭘 어쨌다고 한 건 정말이지 그 위대하다는 아무개가 아니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여간 이 이종락의 혁명군 길강지구 사령부도 그 운명이 그리 길지 못 했습니다.
1931년 1월 28일 조선혁명군 길강지구 사령부의 주요 멤버들이었던 대장 이종락, 군사책임자 김광렬, 정치부 책임자, 장소봉 등이 장춘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조선혁명군 길강지구 사령부 전원이 체포됨으로써 이 부대는 사실상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아니 이해 3월 유하현에 있었던 것으로 하여 이 체포를 피할 수 있었던 최창걸에 의해 다시 이 부대를 일으켜 세우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얼마간 추진되던 중 갑자기 그 주인공인 최창걸이 행적이 사라지면서 결국 이 시도마저 흐야 무야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김일성은 여기서 더 활동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끼고 체포를 피해 당시 자기 어머니 강반석이 동생들인 철주 영주와 함께 있던 안도에 나왔습니다.
하여간 이때 김일성이 이 곳에 나타난 것은 그 어떤 차후 혁명의 큰 뜻을 펼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종락 등의 체포된 후 추적을 피해 왔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것이 바로 그 휘황찬란하다는 김일성의 초기혁명 활동 진실입니다.
오늘 강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안녕히 계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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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04-14 (조회 : 2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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