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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단 사건의 진실과 김일성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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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혁명역사 강좌 (7)

1. 동만에서의 유격대 조직과 김일성의 행적

지난 시간에는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의 시작에 대해 보았습니다.
즉 중국공산당 만주 성위의 지시에 의해 만주 전역에서 항일무장투쟁이 시작되었고 그 와중에 동만 지역에서도 항일유격대가 조직되었던 것입니니다.
그런데 이 동만지역에서의 항일유격대 조직은 다시 말하지만 김일성의 그 어떤 비범한 투쟁과 노력에 의해 조직된 것이 아니라 중국공산당 만주성위 동만 특위에 의해 조직 된 것입니다.
당시 동만 특위 서기는 동장영이라는 중국 사람이었고 조직부장에 이후 외눈깔 왕가라고 불리었던 김성도였습니다.
김일성은 이종락의 조선혁명군 길강지구 부대가 괴멸되자 체포를 피해 안도지방에 나와 숨어 있다가 우사령 반일부대 별동대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른바 무장투쟁에 참가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후 김일성은 이 우사령의 부대에서도 나와 무송일대에서 활동하던 양세봉의 조선혁명군에 찾아갔으나 푸대접을 받고 다시 돈화, 액목, 영안 등지를 거쳐 소왕청에 나타났습니다.
거기서 동만특위서기 동장영의 신임을 얻어 왕청유격대 양성용 대장의 정치위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김일성은 동만당 특위 특히 왕청현 현위 군사부 지시에 따라 양성용 등과 함께 소왕청 방어 전투에도 참가했고 1933년 9월에는 오의성의 반일부대가 동녕현성 진공전투를 벌리는 데도 따라 갔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동만 각지에서의 유격투쟁이 서서히 고개를 쳐들기 시작하자 일제의 반공모략책동도 이와 함께 점차 강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여 동만 각 유격 근거지 안에는 심각한 위협이 서서히 검은 구름장으로 드리우기 시작하였습니다.

2. 동만유격근거지에서의 반 민생투쟁의 시작

원래 이 “민생단”이라는 조직은 1931년 10월 서울 매일신보 부사장 박석윤이라는 자 등이 간도을 방문하였을 때 만들어 놓은 친일단체입니다.
명목은 “간도 주민들의 생활 산업화를 위하여”라고 달았지만 조직 후 얼마 되지 않아 흐지부지하다가 결국 해산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간도 협화회”라는 조직으로 다시 나긴 했지만 그 조직 역시 이렇다하게 활동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조직 주요 멤버였던 김동환이라는 자의 이후 활동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원래 이 자는 한때 쏘련에 들어가 쏘련공산당에도 입당하였고 이후에는 다시 만주로 나와 결국 일제의 밀정으로 전락되고 만 자입니다.
이 자가 연길현 노두구 구위서기었던 송일이 등과 손을 잡았습니다.
송일이로 놓고 말하면 그도 한 때에는 프로레타리아 해방에 대해 목이 터지게 외치던 자였지만 추수폭동을 전후한 시기 일제 경찰에 처포되자 그 길로 변절하여 일제의 개로 전락되었습니다.
일제는 그를 다시 근거지에 박아 넣기 위해 거짓 탈옥사건을 조작하였고 그는 거짓 열성을 부려 노두구 구위서기 자리에 까지 올랐던 것입니다.
이 민생단 사건이 처음으로 수면위에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역시 북한에서 발행한 최현의 회상기와 같습니다.
1932년 가을 최현이 속한 부대는 이 일대 어느 한 농촌부락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하고 마당에 나와 한담들을 하는데 마을 농민으로부터 앞 철교 근방에 수상한 사람 몇이 서성거린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최현이 품속에 다태갈이라는 구식 보총을 숨겨가지고 나갔는데 마을을 엿보던 사람들이 황급히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최현이 급사격으로 그들 모두를 사살하였는데 그 중 한 자의 품속에서 노두구 구위서기 송일이에게 가는 편지가 나왔습니다. 이것고 곧 현위에 보고되고 송일이 체포되었습니다.
최현의 회상기에서 “송노톨”이라고 불리워졌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송일을 체포하여 심문하는 과정에 그가 20여 명의 동조자의 이름은 불었으나 경계가 약한 틈을 타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당연히 이 일은 동만당 특위에 보고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로 말하면 동만 당 특위에서는 만주성위로부터 근거지 안에 잠입한 일제 주구단체와의 투쟁을 강화할데 대한 지시문을 받고 그 집행을 준비하던 시기였습니다.
결국 이 반 “민생단”투쟁은 일파만파 피비린 숙청에로 확대 되었습니다.
다음해인 1933년 3월 이른바 “외눈깔 왕가”라고 불리우던 동만당 특위 조직부장 김성도가 화룡현 반 “민생단”투쟁을 책임지고 나갔습니다.
그는 곧 이 곳에서도 피비린 숙청을 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투쟁에서 화룡현 병기창 책임자였던 박영순의 일가족 12명도 학살당했습니다.
또 이후 빨찌산의 여장군으로 이름난 김확실의 남편 강위룡도 이때 민생단에 걸려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곧 동만 4개 현 유격근거지 전체에서 이 반“민생단”투쟁이 불길처럼 타번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훈춘현 유격근거지에서는 만주 성위에서 내려간 반경유라는 순시원이 훈춘유격대 3대대 정치위원 박두남에게 살해되면서 전체 유격대의 70프로가 “민생단”이라는 동장영의 억지에 의해 그해 안으로 간부 60명을 포함하여 근 100여 명의 애매한 사람들이 민생단 감투를 쓰고 학살되었습니다.
그 누구든 일단 민생단으로 의심 받으면 무조건 체포하여 고문을 가했고 그러면 그 사람은 견딜 수 없어 다시 수 많은 사람을 민생단 혐의자로 불므로써 이 반민생단 투쟁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습니다.
그리하여 실제 민생단은 불과 몇 명 되지 않았으면서도 근거지 내에는 마치 민생단이 아니 사람보다 훨씬 많은 것 같은 분위기까지 조성되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결국 이 투쟁에서 제일 앞장에서 열성을 보였던 동만당 특위 조직부장 김성도 자신까지 33년 9월에는 민생단 감투를 쓰고 처형당했습니다.
일은 실로 점점 겉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습니다.
이해 11월에는 다시 화룡현에서 화룡현위 서기였고 이후 장백 소학교 뒷산에서 총살당한 이계순의 남편이었던 김일환이 역시 민생단 루명을 쓰고 처형당했습니다.
한편 왕청현에서는 이 해 말 왕청유격대장이었던 양성용까지 민생단 누명을 쓰고 해임되고 김일성도 끝내는 정치위원자리에서 해임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북한 당 역사 연구소에서는 김일성은 결코 이 투쟁에서 걸려 든 적이 없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도 이때 걸려 들어 해임되었습니다.
그리고 일개 병졸로 왕청유격대 제 4중대에서 근무하면서 아동단 사업에 개입하였습니다.

3. 동만 유격근거지에서의 반“민생단”투쟁의 종말

실로 동만 각 현 유격근거지에서의 반 “민생단” 투쟁은 그 끝을 모르고 날로 치열하게만 전개 되었습니다.
하여 이 투쟁 속에서 연길현 유격대 대장이었던 박동근이도 학살되고 또 주진을 비롯한 많은 건실한 애국자들이 민생단 누명을 쓰고 살해 당하였습니다.
실제로 이 반“민생단”투쟁에서 살해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약 5백 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투쟁이 점차 내리막길에 들어서게 된 것은 동만당 특위서기 동장영이 죽고 그의 후임으로 하르빈 당서기를 하였던 위중민이 오면서 부터였습니다.
위중민이 이곳에 온 것은 구체적으로 1935년 1월이었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이 문제를 매우 중시하면서 반“민생단”투쟁을 더욱 확실히 할데 대한 수차례의 지시도 내려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록 반“민생단”투쟁문제는 확대되어만 가고 도저히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여 1935년 2월 24일부터 3월 3일까지 왕청현 다홍왜에서 이른바 “다홍왜 회의”라는 것이 열리었습니다.
북한 당역사 연구소에서는 이 회의에 김일성이 참가하여 마치 반“민생단”문제의 결함을 결정적으로 시정하게 한듯이 주장하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김일성은 이 회의에 애초에 참가하지도 못했습니다.
이 회의에는 중국인 13명, 조선인 13명이 참가하였는데 그들은 다음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중국인 왕덕태, 위중민, 왕중산, 주수동, 이학충, 장창수, 왕윤성, 조아범 등이었고 조선인들로는 이송일, 임수산, 최봉문, 강창연, 김동규, 등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회의에서도 똑바른 결론은 나지 못했습니다.
회의에서는 새로 동만당 특위가 구성되었는바 그 책임서기에는 위중민, 선전부장 이학충, 조직부장 조아범이 되었습니다.특위 집행위원회에도 왕중산, 왕윤성, 림수산, 왕덕태가 조선 사람은 임수산이 하나만 되었을 뿐입니다.
다만 이 회의에서 전 동만적인 숙반위원회가 새로 조직되었는바 여기 위원장으로 이송일이 되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회의가 끝나고 불과 두 주일도 되지 않아 이송일이 다시 “민생단”으로 몰려 학살되는 것으로 하여 실제 조선 사람들은 완전히 주도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리하여 다시 3월 21일 요영구 회의가 열리었는데 여기에 금방 민생단 혐의에서 벗어난 김일성이 4단 정치위원으로 참가하였습니다.
회의에서는 주로 동만 유격근거지를 해산할데 대한 문제와 반민생단 문제가 토의되었으나 여기서도 김일성은 그 어떤 결정적인 발언을 할 만한 위치에 있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 회의 이후 반 민생단 문제는 만주 성위에까지 보고되어 위중민의 수습으로 해결되었을 뿐입니다.
오늘 김일성 혁명역사 강좌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입력 : 2008-04-29 (조회 :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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