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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새 체신소

차영란씨가 그리운 고모님에게

방송일 : 2019-12-06  |  진행 : 김정현  |  시간 :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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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새 체신소는 세대를 이어가며 가슴에 한으로만 남은 실향민, 탈북인들의 고향과 혈육에 대한 그리움을 북녘으로 전해 드립니다.
손 내밀면 지척인데 갈 수 없는 곳이어서 더 가슴 아픈 북한으로 뜨거운 눈물과 그리움을 담아 전하는 그 들의 사연을 신청자 본인들의 목소리로 직접 전해드립니다
 
<파랑새 체신소 >편지
보고 싶은 고모에게
고모, 그 동안 안녕하셨어요?
제가 고모님과 눈물 속에 헤어진지도 어언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고모님, 그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고 계시는지요, 혹시 살아나 계신지, 전 그 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늘 계속되는 가난에 늘 쪼들려 사시노라 나이보다 엄청 겉늙어 보이시던 고모님의 주름지고 훌쭉한 얼굴을 그려 보면 죄송함과 연민의 정이 함께 어울려 제 마음은 갈기갈기 찢기는 것만 같습니다.
고모님, 어린나이에 부모님을 잃고 오갈 데 없는 저를 품에 안아 친자식보다 더 귀하게 키워주신 고모님의 그 태산 같은 은혜  저는 죽어서도 못 잊습니다.
고모님은 언제나 저에게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다 합쳐 아니, 그 보다 더 넘치게 주셨습니다. 고모님도 엄청 어렵게 사시면서 좋은 옷이 생기거나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친자식보다 항상 저를 더 먼저 생각해 주셨습니다.
중학교가 멀어 도시락을 싸 가지고 가야 할 때도 친자식들의 도시락에는 강냉이 쌀에 무 섞인 밥을 싸 주시고 제 도시락에는 흰쌀이 조금이라도 들어가게 싸 주시노라 늘 마음 쓰시던 게 고모님이었습니다.
어쩌다 우연히 사탕 한 알이 생기면 품속에 감추셨다가 부모 없이 크는 불쌍한 조카라고 제 손에만 가만히 쥐어주시며 항상 측은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시던 인자한 그 눈빛을 저는 아직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고모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고 1년이 지난 어느 날, 그 날은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눈보라까지 치는 을씨년스러운 날이었죠?
외화벌이에 동원되었던 맏아들이 굴이 무너져 시체도 못 건지고 갱 속에 묻혔다는 비보를 받은 고모가 진눈에 젖은 흙 담벽이 무너지듯 땅에 풀썩 주저앉아 정신을 잃으셨습니다.
쓰러진 고모님 앞에서 전 어쩔 바를 모르고 그저 울기만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12시간 지나 다시 정신을 차리신 고모님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그 날 산에 오르셨고 풀죽을 쑤어 식구들에게 먹이셨습니다.
그 후부터 고모님의 얼굴엔 밭고랑처럼 주름만 나날이 더 늘어갔고 말 수는 점점 더 적어지셨어요.
하지만 식구들이 없을 때에는 멍하니 앉아 소리 없이 가슴을 뜯으며 눈물을 흘리시던 고모님이었습니다. 화는 쌍으로 온다고 하더니 그렇게 맏아들이 죽고 채 1년도 되지 않아 또다시 청천벽력 같은 일이 또 일어났었죠.
고모님, 식료공장에서 일하시던 고모부가 공장에서 얻어온  쑬 깡치에 풀을 섞어 주식으로 드시더니 공장에서 사망해 들것에 실려 집으로 오지 않았나요.
얼굴과 옷에 피를 가득 바른 채 눈도 감지 못하고 숨을 거두신 고모부 앞에서 사시나무 떨 듯 온 몸을 떠시던 고모가 그 모습을 보고 또 한 번 기절을 하고 쓰러졌습니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우려내지 않은 술 찌꺼기를 오랫동안 주식으로 먹어 위에 구멍이 났고 그래서 피를 흘리며 사망했다고 하였습니다.
고모님, 다시 정신을 차린 고모가 고모부의 시체 우에 엎드려 피를 토하듯 슬피 울며 하시던 그 날의 절규가 오늘도 제 귀에 쟁쟁합니다.
하지만 그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막내아들도 끝내 굶어죽고 말았죠. 경수가 마지막 숨을 거두며 “엄마, 쌀밥 한 그릇 먹으면 살 것 같아요”하며 가슴 터지는 유언을 남기지 않았나요.
그 후 고모님은 몸져누우셨고 나는 고모님을 살려 보려고 장마당, 기차역을 헤매며 구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모님이 제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당부하셨죠. “너는 나를 생각하지 말고 빨리 떠나라. 중국에 가면 개도 쌀밥을 먹고 산다고 하더라. 빨리 중국으로 가서 너라도 살아야 한다. 그래야 이 다음에 저 세상에 가면 네 아버지, 엄마 볼 면목이 있지 않겠니.” 그렇게 제 등을 떠 밀어 주시던 고모님이셨죠.
전 차마 아프신 고모님을 두고 떠날 수 없어 망설였는데 먼저 가서 자리를 잡으면 어떻게든 고모님도 뒤 따라 오시겠다, 시며 그 날 강을 건너는 사람과 함께 가도록 해 주셨습니다.
고모님, 저는 그렇게 중국으로 들어가 5년 동안 두려움과 외로움에 떨면서 살다가 지인들의 도움으로 대한민국으로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고모님과 연계를 할 수가 없었고 지금은 같은 땅에 살지만 안부조차 물을 수 없는 남이 된 강토에 살다보니 더군다나 더 소식을 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고모님, 저는 고모님을 어느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은 벽돌 한 장 옮긴 적 없는 저 같은 사람들은 한 민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집도주고 많은 건 아니라고 생계비도 주고 있어요.
북한에서 고모부가 사망한 후 어느 겨울 날 고모와 함께 눈보라치는 추운 겨울에 왕복 20리 먼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나무 단을 등에 진채 산에서 굴러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 왔던 고모님 생각을 하면 땔 감 걱정 없이 사는 제가 미안하고 죄송스러워 집니다.
고모님, 제가 떠 날 때 고모님을 모시고 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한 순간 잘 못한 선택이 지금도 너무 후회스럽고 고모님 생각을 하면 늘 죄인 같은 마음입니다.
늘 피부병으로 고생하시던 우리 고모님, 더운 물 한 번 마음대로 쓸 수 없어 목욕 한 번 시원하게 할 수 없던 고모님을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고모님, 북한에서 그렇게 억울하게 왜 내가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죽은 사람들이 고모님 식구들 뿐 이 아니라는 걸 전 한국에 와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천상천하유아독존, 이란 말처럼 자기보다 못한 삶, 자기보다 존귀한 삶은 없다는 것도, 인간은 다 같이 날 때부터 평등해야 한다는 것도 여기 대한민국에 와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고모님, 제 삶이 이제 더 바랄 것 없지만 고모님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고모님, 저는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만, 그리고 그 날까지 고모님이 건강하게 살아 계시기만 간절히 바랍니다.
그 게 제 소원이고 간절한 바람입니다.
사랑하는 고모님, 그 날까지 부디 안녕히 계시기 바라며 오늘 편지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늘 고모님을 그리워하는 조카 영란 올림
입력 : 2019-12-06 (조회 : 62)  |  북한개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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