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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방송

9.9절 특집방송 : 3회 스탈린, 북조선 지도자를 시험하다

방송일 : 2019-09-11  |  진행 :  |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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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과 김일성을 불러 지도자 시험을 친 쓰딸린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올해 9월 9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71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조선개혁방송은 공화국 창건 71돐을 맞아 쏘련과 중국이 공개한 력사적 자료들과 사실을 토대로 북조선 정부 수립의 진실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세 번째 시간에는 쏘련의 지도자 쓰딸린이 북조선의 김일성과 남조선의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지도자 시험을 쳤었다는데 대해 말씀드립니다.
1945년 5월 9일 독일이 항복하자 미국, 영국, 쏘련은 독일의 포츠담에서 전후 독일의 처리문제를 론의했습니다. 7월 26일의 포츠담에서 발표한 공동선언은 일본의 항복을 권고하고 조선의 해방을 확인했습니다.
쏘련은 8월 9일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와 조선으로 진격하면서 북조선 정권수립을 위한 실천에 들어갔습니다. 쏘련 제25군단이 8월 24일 평양에 들어와 군정을 설치했는데 이때 이미 서울에서는 박헌영이, 평양에서는 현준혁, 함흥에서는 오기섭이 공산당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평양에서는 민족주의 지도자 조만식이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고 신의주를 통해 중국에서 활동하던 애국자들이 귀국하고 있었습니다. 서울과 평양, 함흥 등 전 조선의 중요도시에서 활동하던 유명한 공산당 지도자들이 쏘련에 전적으로 협조하고 충성할지는 의문이였습니다.
평양의 정치상황을 그대로 방치하면 조만식을 지도자로 하는 민족주주의 세력이 정권을 잡을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8.15 해방 초기 조선의 이런 현실은 평양의 쏘련군정 사령부가 스탈린에게 보낸 ‘북조선 정세 보고서’에 낱낱이 반영됐습니다.
사태를 파악한 모스크바의 최고사령부는 극동 제25군단 치스챠코프 사령관에게 북조선 지도자감을 빨리 찾으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북조선 내에서 당장 쏘련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듣고 대중의 지지를 받을만한 지도자감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리하여 극동군 제25군단 사령부는 체까 극동지역 본부와 협의를 하다가 88정찰려단 제1대대장 김일성을 추천했습니다. 체까란 국가안전보위부와 같은 기관으로 쏘련의 10월 혁명 후에 만들어진 쏘련의 정보기관입니다.
김일성 북조선 지도자 후보로 추천된 것은 쏘련군대의 훈련과 교육을 잘 받았고 부대내에서 어느정도 인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다가 극동 제88여단 려단장이였던 중국사람 주보중의 평가도 좋았기 때문입니다.
김일성이 후보로 선택됐다는 보고를 받은 스탈린은 극비밀리에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보내라는 긴급 명령을 극동군사령부에 내려보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45년 9월 초에 김일성은 조선으로 귀국하지 않고 모스크바로 날아갔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쏘련정부가 공개한 정부 문서와 1945년 당시 북조선 평양의 쏘련군정에서 핵심역할을 했던 사람들의 증언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당시 쏘련 극동군 총사령관 와씰리옙스키 원수의 일본어 통역을 했던 꼬바넨꼬 이완 이와노위치가 1992년 5월 남조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공개했습니다.
군용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에 도착한 김일성은 곧바로 스탈린의 전용 별장으로 가서 스탈린을 만났습니다. 쓰딸린의 극비 지시로 김일성이 모스크바로 갔기 때문에 극동군 총사령부 내에서도 군사위원 치낀 상장 등 몇 명만 알고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김일성을 만난 스딸린은 식사를 하면서 극동군 사령부에서 올려보낸 김일성 평가보고서를 보며 각종 질문을 했습니다. 쏘련군 대위 견장을 단 군복을 입고 있던 김일성은 너무나 긴장해서 쓰딸린의 질문에 무조건 네, 네 하는 답변만 하는 정도였습니다.
이 만남이 있고 나서 쓰딸린은 “주목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다. 쏘련군정은 이 사람에게 적극 협력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스딸린의 면접시험에서 통과한 김일성은 북조선의 예비 지도자가 되어 1945년 9월 19일 쏘련군함 뿌가쵸브 호를 타고 원산항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김일성이 북조선의 지도자로 확정된 것은 아니였습니다. 당시 북과 남이 38선으로 분단되면서 남조선에는 미국이, 북조선에는 쏘련이 진주해 있었고 서울과 평양의 정치정세는 아주 복잡했습니다.
특히 남조선 서울에서 활동하던 조선공산당 총비서였던 박헌영은 경력과 사상리론이 아주 좋았습니다. 박헌영은 1921년에 이르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해 지부에 입당하여 고려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가 되어 공산주의 운동을 오래했습니다.
8.15 직후 초기 박헌영은 서울에서 활동했는데 서울의 쏘련 령사관에서는 쓰딸린에게 보내는 보고서에서 박헌영을 북조선의 지도자 감이라고 추천했습니다. 당시 서울의 쏘련 령사관 샤브신 부영사는 박헌영을 높이 평가했고 평양의 쏘련군정 정치위원 발라샤노브도 박헌영을 지지했습니다.
쏘련 극동군사령부에서는 김일성을 북조선 지도자 후보로 추천했고 쏘련 외무성과 체까에서는 박헌영을 지도자 후보로 추천했습니다. 그리하여 박헌영과 김일성은 서로 지도자가 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렸는데 박헌영이 1946년 5월 김일성과 쏘련군정에 대한 불만을 적은 편지를 쓰딸린에게 보냈습니다.
박헌영의 편지를 본 스딸린은 “박헌영과 김일성을 내가 직접 만나볼테니 모스크바로 보내라”고 명령했습니다. 당시 쏘련 제25군단 정치위원을 했던 레베데프는 1991년 11월 5일 남조선 중앙일보 김국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스딸린이 김일성과 박헌영을 만난 사실을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쓰딸린 대원수가 김일성, 박헌영을 만나는 자리에 책임자로 참가했던 쏘련극동군구 사령부 군사위원 스티코프 상장과 로마넨꼬 소장은 평양으로 돌아와 나에게 당시 상황과 배경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습니다.
스티코프 장군은 하바롭스크에서 모스크바로 직행해서 스딸린을 찾아갔습니다. 크레물린 궁전에 들어가보니 스딸린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김일성, 왼쪽에 박헌영, 그리고 정면 중앙에 스티코프 장군, 그리고 좌우측에 평양 측의 로마넨꼬 장군과 서울 측의 샤브신 등이 앉았습니다.
스티코프는 자리가 까다로운 크레물린 궁전의 좌석배치를 보고 분위기를 단번에 짐작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쏘련에서 제일 중요한 자리로 정해진 스딸린의 오른쪽에 김일성이 앉았다는 것입니다.”
이날 스딸린은 김일성에게는 “쏘련 군정의 협력을 받아 북조선의 쏘베트화 정책을 조기에 실현시키도록 투쟁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박헌영에게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활동하는 동지의 혁명투쟁을 높이 평가한다”고 격려했습니다.
 
김일성에게는 지도자로서의 활동을 하고 박헌영에게는 열심히 노력하라는 뜻이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해서 김일성은 스딸린으로부터 두 번의 시험에서 충성심을 인정받아 북조선의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신탁통치와 1948년 북과 남의 정부 수립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조선개혁방송에 김승철이었습니다.
입력 : 2019-09-10 (조회 : 99)  |  북한개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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