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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방송

8.15 특집방송: 1회 일본의 공격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

방송일 : 2019-08-13  |  진행 :  |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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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인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조선개혁방송은 일제 36년 식민지 통치에서 해방된 8.15 74주년을 맞으면서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오늘 첫 시간에는 일본의 공격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북조선에서는 아직도 김일성 주석이 항일빨찌산 투쟁으로 일본을 패망시켰기 때문에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해방된 것으로 선전합니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은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의 히로히토 천황이 미국에게 무조건 항복선언을 발표한 날입니다.
1945년 8월 13일 일본 내각이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고 일본의 결정을 연합국에 전달했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 히로히토 천황은 1945년 8월 15일 낮 12시에 일본 국영방송인 NHK를 통해 항복 선언 방송을 했던 것입니다.
일본의 항복을 받아준 것은 김일성 주석의 항일빨찌산이 아니라 미국이였고 그 직접적 계기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전 원자탄 공격이였습니다. 일본이 미국에게 항복한다는 문서에 정식으로 서명한 것은 1945년 9월 2일 일본 도쿄만에 정박하고 있던 미국 전함 미주리호 선상이였습니다.
일본과 미국이 싸운 전쟁을 태평양전쟁이라고 부르는데 태평양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일본에서는 미국과의 전쟁 이전에 중국과, 쏘련 등과의 전쟁을 하고 있었기에 대동아 전쟁이라고 불렀습니다.
일본과 미국 사이에 벌어진 태평양전쟁은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태평양 동쪽의 하와이에 있는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시작됐습니다. 미국 하와이주의 진주만에는 미국의 태평양함대 사령부가 있고 해군 병참기지들이 있었습니다.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아침 일본의 항공모함에서 떠오른 군용기들이 진주만의 태평양함대와 공군 및 해병대를 타격했습니다. 이 공격으로 미국은 18척의 해군함선이 침몰 또는 파괴됐고 188대의 비행기가 격추 또는 파괴됐으며 2천335명의 군인이 사망했습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있은 다음날 미국 투르먼 대통령은 일본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에 대한 공격이 있기 전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하지 않았고 미국 우선주의로 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이 미국을 공격한 것은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벌려놓은 전쟁으로 인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은 뽈스까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여기에 일본은 이딸이아 등과 함께 주축국이 되었습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전인 1937년에 만주사변을 계기로 중국을 침략했고 남진하여 필리핀, 인도네시아, 대만 등의 나라들을 점령했습니다. 당시 동남아시아의 나라들은 이미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등의 식민지들이 많았는데 이 나라들에 있는 자원이 일본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일본은 아시아 침략에 나서면서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는데 대동아라는 말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더한 지역을 말합니다. 대동아공영권은 대동아의 신질서 건설이라는 말로 일본의 전쟁 목적이 대동아 신질서 건설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본의 이러한 침략에 맞서 미국은 일본에 대한 경제제재와 군사적 압박을 가했고 여기에 영국과 네덜란드도 참가했습니다. 미국과 영국은 무기 제조에 필요한 고철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것을 금지했고 원유수출도 금지하면서 일본을 압박했습니다.
이로인해 미국과 인도네시아에서 원유를 수입하던 일본은 경제, 군사적으로 치명적 타격을 받았습니다. 일본은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점령과 미국과의 관계를 위해 1940년부터 미국과 협상을 시작했지만 성과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하와이의 미국 태평양함대를 공격하여 태평양에서 미국의 해군력을 무력화시켜서 미국의 압박을 늦추거나 막기로 했습니다.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태평양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450대의 비행기를 실은 항공모함 6척, 전함 2척, 순양함 3척, 구축함 9척을 동원했습니다.
당시 하와이 진주만에 있는 미국 태평양함대에는 전함 8척, 순양함 6척, 구축함 29척, 잠수함 9척, 항공모함 2척 등 많은 군사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공격할 수 있다는 정보를 받고도 무시해버리고 안일해 있다가 일본의 단 한번의 공격에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일본의 공격으로 미국은 18척의 전함과 순양함, 구축함 등이 침몰했습니다. 그리고 230여대의 항공기가 파괴되고 2천400여명이 사망하고 천178명이 부상당하는 등 미국 태평양함대의 군사력은 완전히 괴멸되였습니다.
반면에 일본의 피해는 항공기 29대, 특수공격잠수정 5척, 사상자는 65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에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은 12월 7일을 치욕의 날로 정했고 3일 뒤인 12월 10일 미국 의회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이어 연합국에 속한 영국과 카나다, 네덜란드와 중국과 오스트랄리아 등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미국이 전시체제에 돌입하고 군사력을 강화하면서 태평양의 섬들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치열한 전투로 전개됐습니다.
태평양전쟁 과정에 미국은 첨단 과학기술과 세계 최강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비롯한 최강의 군사력을 갖추었습니다. 1942년 중반까지 일본은 인도양에서 중앙 태평양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미국의 반격으로 태평양에서 쫒겨나게 됩니다.
1942년 6월 5일 태평양의 중요한 전략 요충지인 미드웨이 섬 주변에서 미국과 일본의 항공모함 간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전투에서 미국은 일본의 항공모함 4척을 격침시키고 태평양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반격에 나서 일본 본토에까지 공격에 나섰습니다.
1943년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군사력은 명백하게 약해졌고 미국은 태평양과 동남아시아에서 일본을 압박했습니다. 1944년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해군력은 거의 괴멸되다 시피 했고 태평양의 섬들과 동남아시아의 식민지를 거의 다 빼앗기고 일본 본토에서 결사항전을 준비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일본군이나 일본 인민들이 자결과 자살을 하면서 결사적으로 저항하자 일본에 원자탄 투하를 계획하게 됩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8월 8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했고 이를 계기로 일본은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미국에 전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태평양전쟁도 끝나고 제2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끝나게 된 것입니다. 북조선에서 김일성 주석이 일제를 패망시켰다고 선전하지만 일제를 패망시킨 것은 미국이였습니다.
다음시간에는 미국은 왜 일본에 원자탄을 투하했는가에 대해 알아봅니다.
지금까지 조선개혁방송의 김승철이였습니다.
1.일본의 대륙침략과 태평양전쟁 참전
 북한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전쟁과 평화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신종태 연구원입니다.
  올해는 일제식민지 통치에서 해방된 지 71년이 되는 동시에 우리나라가 북과 남으로 분단된 지도 71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조선개혁방송에서는 조국해방 71주년을 맞이하여 과연 우리 조선을 점령했던 일본 제국주의가 누구에 의해 무너지게 되었으며, 조선이 어떻게 일본 제국주의 압제의 사슬을 끊고 해방되었는지 알아보는 특집 강좌를 준비하였습니다. 
  이 강좌는 모두 4번에 걸쳐 일본의 만주대륙 침략과정, 태평양전쟁 발발,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그리고 과연 일본은 누구에 의해 패망되었는가? 하는 주제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일본의 대륙침략과정과 태평양전쟁 발발 배경”에 대해 먼저 설명드리겠습니다.
우선 일본의 만주대륙 진출배경에는 역사적으로 일본인들의 끝없는 영토확장에 대한 욕구를 잘 살펴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일찍이 일본은 1592년 임진왜란을 통해 우리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전쟁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일본 민족은 섬나라라는 좁은 농토와 제한된 자원으로 인해 항상 자체 생존에 많은 어려움을 느끼고 살아 왔습니다. 따라서 조선반도와 그 이북의 대륙을 차지함으로 생존을 위한 자원 확보와 아시아 지역에서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야심을 항상 가져온 민족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드디어 일본은 19세기 아시아지역에서 가장 빨리 서구 과학문물을 받아들여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그 결과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며 세계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게 되죠. 이런 국력을 바탕으로 1910년 8월 29일,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을 강제로 합병시켰고 이때부터 우리 민족은 일제강점기 아래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게 됩니다. 조선 합병에 이어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당시 청나라를 압박하면서 만주대륙으로의 진출을 꿈꾸게 됩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하고 장개석이 통치하는 중화민국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중국대륙에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신생 중화민국은 정부의 통치력이 전국으로 미치는 데 많은 한계를 느끼는 상황이었죠. 예를 들면 만주지역에는 장작림이라는 군벌이 실제적인 통치를 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이런 혼란한 중국 정치상황을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교활하게 잘 이용하였습니다. 결국 만주사변은 이런 정치적 상황 속에서 1931년 9월 18일, 만주의 일본 주둔군인 관동군의 간계로 일어나게 되죠.
즉 당시 만주지역의 철도는 일본이 건설했고, 그 시설에 대한 관리와 경계는 관동군이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23분 경, 만주 봉천 부근의 철도가 폭파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말할 것도 없이 일본 관동군의 자작극이었습니다. 그러나 사건 다음날인 1931년 9월 19일, 일본은 자신들의 정당한 주권이 침해 당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면서 군대를 동원하여 중국군을 공격하게 됩니다. 바로 이 사건이 만주사변의 시발점이 된 것이죠.
중국에서는 일본의 만주침략에 대해 격렬한 반대시위가 일어났지만 당시 장개석은 중국 내 공산군과 내전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을 주저하게 됩니다. 즉 직접적인 무력응징보다는 국제여론을 통한 압력으로 일본이 물러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에 비해 일본 관동군의 음모는 치밀하였죠. 즉 일본 군부는 만주지역을 “친일 괴뢰정권 수립-만주국 독립-일본 영구 소유화”라는 단계를 거쳐 일본영토로 편입시키려고 계획했던 것입니다.
 결국 일본은 천진에 있는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를 탈출시켜 만주로 데리고 갑니다. 부의는 1912년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되면서 청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난 인물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이라는 일본 괴뢰정권이 탄생하게 됩니다. 당시 만주국의 영역은 봉천성, 길림성, 흑룡강성의 동북 3성으로 인구는 약 3,000만 명 정도였습니다. 이런 만주국은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항복할 때까지 유지되었습니다.
이처럼 중국과 일본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1937년 7월 7일,북경 부근 노구교에서 중국군과 일본군 간 작은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노구교 부근에서 야간훈련 중이던 일본군 중 실종자가 발생하였는데, 이 때 일본군 장교가 실종된 일본군 병사를 찾는다는 미명하에 중국군 병영의 수색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를 거부하는 중국군과 일본군 사이에 가벼운 충돌이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일본은 본토에서 3개 사단, 조선에서 1개 사단을 중국으로 급파하게 됩니다. 다분히 중국침공을 위한 일본의 의도적인 행동이었죠. 드디어 1937년 7월 말, 일본은 천진과 북경을 공격하고 8월에는 상해로 전쟁을 확대하게 됩니다. 것이 중일전쟁이 시작된 시점의 과정입니다.
특히 그 해 12월에는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남경을 일본군이 점령하게 됩니다. 이 도시를 점령한 후 일본군은 잔악무도하게도 선량한 시민 약 30만 명을 학살하게 되죠. 이 사건이 바로 오늘날까지 중국인들을 분노하게 하는 “남경 대학살”사건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중일전쟁은 무려 8년간 계속되었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항복하면서 끝이 나게 됩니다.
 다음은 태평양전쟁 발발배경과 과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이 중일전쟁을 치르고 있는 동안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되죠. 즉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하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게 됩니다. 그 이후 1940년 5월, 독일이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를 침공하면서 본격적으로 유럽지역 전체가 전화에 휩싸였습니다. 이때 일본, 독일, 이탈리아 3국은 서로 동맹을 맺고 미국, 영국, 프랑스 연합국과 대결의 각을 높이게 됩니다.
 특히 일본은 중국대륙에서 아무런 소득도 없이 오랫동안 전쟁을 진행 중인 상황이었죠. 따라서 일본은 유럽 전쟁 상황을 이용하여 동아시아에 있는 유럽식민지를 강탈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즉 당시 네덜란드 식민지인 인도네시아와 프랑스 식민지 인도차이나, 영국이 지배하고 있는 말레이반도에 눈독을 들이게 되죠. 특히 석유, 고무, 주석이 풍부한 이 지역을 장악하면 경제적 자립도 가능하고 태평양지역의 지배세력이 될 수 있다는 야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일본이 이 지역을 침략하면 미국이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따라서 일본 군부는 미국을 사전에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과 필리핀 미군 군사시설을 공격하기로 계획하게 됩니다. 이것이 태평양전쟁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일본군 전투기와 폭격기 360대가 진주만의 미 해군기지를 기습공격하면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고, 미국은 즉각적으로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 이어서 중국대륙과 태평양상에서 벌어진 전쟁의 실상을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처럼 일제 식민통치로부터의 조선해방은 오직 김일성의 항일투쟁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 당시 국제적 상황을 이해함으로써 분명히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시간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입력 : 2019-08-13 (조회 : 36)  |  북한개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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