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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방송

6.4 천안문사태 특집: 2회 천안문 사태의 과정과 민주주의

방송일 : 2019-06-04  |  진행 :  |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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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4일 중국 수도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인민들의 시위가 무자비하게 진압됐습니다. 땅크를 앞세운 군대는 평화적인 시위를 벌리는 인민들을 깔아뭉개버렸습니다.
조선개혁방송에서는 천안문 사태 30주년을 계기로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오늘 첫 번째 시간에는 천안문 사태의 과정과 민주주의에 대해 알아봅니다.
지금으로부터 30년전,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은  시위군중의 피와 시체가 가득했었습니다. 중국 공산당 정권이 완전무장한 군대와 땅크, 장갑차를 앞세워 평화적으로 시위를 벌리는 군중을 깔아뭉개고 사격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중국의 젊은이들은 천안문광장 사태, 중국말로 6.4운동에 대해 거의나 모르고 있습니다. 중국 공산당이 중국내에서는 천안문 사태에 대해 말하지 못하게 하고 인터네트를 비롯한 모든 정보를 차단하며 통제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천안문 광장사태는 개혁개방의 후유증으로 인민들의 불평과 불만, 분노가 축적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집적적으로는 호요방이 4월 15일 공산당 중앙정치국 회의에 참가했다가 집으로 돌아가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중국 지도부 최고위급 간부들 중에서 민주적인 개혁파였던 호요방이 권력에서 밀려난데다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자 인민들은 애도에 나섰습니다. 즉시로 천안문 광장에 호요방 전 주석을 추모하는 추모비가 세워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애도의 뜻을 표시했습니다.
3일째인 4월 17일부터는 부정비리가 없고 청렴했으며 민주적인 개혁파였던 호요방에 대한 재평가와 복권을 요구하는 시위로 이어졌습니다. 18일에는 대학생과 교수들이 중심이 돼서 중국 공산당중앙위원회와 인민대표자회 상임위원회, 국무원에 공개편지를 보냈습니다.
호요방은 1982년부터 중국공산당 주석을 했는데 1987년에 해임됐습니다. 호요방이 해임된 리유는 1986년 중국 안휘성 허페이에 있는 중국과학기술대학에서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렸기 때문입니다.
호요방의 재평가와 복권에 대한 대학생들과 대학교수들이 시위가 전국으로 퍼져나가면서 서안에서는 폭동이, 무한에서는 3만명의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호요방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언론의 자유보장과 관료주의와 부정부패, 공산당 지도부의 잘못에 대한 자기비판 요구 등으로 확대됐습니다.
자발적으로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는 사회각계층의 참가로 더욱 확대되였고 조직화되여갔지만 공산당과 정부는 해산을 요구하며 통제했습니다. 4월 26일 중국 인민일보는 “반드시 단호하게 동란에 반대한다”는 제목의 사설을 제시해 학생들의 시위를 계획된 음모이고 동란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인민일보 사설이 발표되자 베이징 천안문 광장의 시위 군중은 순식간에 10만명 이상으로 늘어나면서 동란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5월에 들어서면서 베이징의 56개 대학과 2만여명의 학생들이 중국 공산당과 정부에 대화를 요구하면서 언론결사의 자유, 민주화 쟁취 등의 구호를 웨쳤습니다.
5월 13일 쏘련의 고르바쵸브 공산당 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했는데 이날에 3천여명의 대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무기한 단식을 시작했습니다. 조직을 갖춘 학생들은 자신들의 평화적 시위를 음모이고 동란이 아닌 애국운동이라는 것을 인정해달라고 정부에 요구하면 단식투쟁을 했습니다.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을 중심으로 시작된 단식롱성 투쟁 소식이 전국으로 퍼져나가면서 전국적으로 100만명 이상이 여기에 참가했습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조자양 총서기가 5월 17일과 19일 단식투쟁을 하는 학생들을 찾아와 단식롱성을 중단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이어 리붕총리도 천안문 광장의 시위대를 찾아와 만나고 간 그날 저녁 수도 베이징시 지역과 천안문 광장에는 게엄령이 내려졌습니다. 이날 내려진 계엄령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이래 처음으로 내려진 것으로 시위 및 파업 금지, 외국기자 취재 금지 등이 포함됐습니다.
학생들과 조자양 총서기는 등소평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로부터 비판을 받았으며 정치적 권한을 제한 받는 등 실권을 잃었습니다. 한편 중국 정부가 계엄령을 발포하자 학생들의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습니다. 학생들은 5월 22일 천안문광장 림시지휘부를 설립했습니다.
학생들은 등소평에게 공개편지를 보내고 리붕과 양상군을 파면할 것을 요구하면서 강경하게 대응했습니다. 이 기간에 중국 정부는 학생들의 시위를 해산시키려고 경찰과 계엄군을 동원했지만 학생들의 시위는 점점 더 격렬해지면서 중국공산당을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1989년은 개혁개방의 후유증, 다시말해 경제분야에서는 개혁개방을 했지만 사회주의 체제와 공산당 정치의 개혁은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당과 행정간부들의 관료주의와 부정부패로 인민들의 불만과 분노가 높아지고 이것이 호요방 사망으로 폭발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의 시위는 점점 중국사회의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여겨지는 중국 공산당으로 비판을 하는데서 자유와 민주주의 요구로 확대, 심화됐습니다. 경찰과 군인들이 학생들을 탄압하려고 했지만 이 과정에서 10여명의 인민해방군 지휘관들은 학생들을 살해하면 안된다며 명령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학생들의 시위가 점점 격화되면서 전국에서 폭동과 시위로 이어지고 등소평과 공산당에게로 화살이 옮겨가자 등소평은 무력진압을 명령했습니다. 그리하여 6월 3일밤 완전무장을 갖춘 중국인민해방군은 땅크와 장갑차를 몰고 천안문 광장으로 돌입했습니다.
6월 4일 새벽 3시, 천안문광장에서 단식롱성을 하던 학생시위대는 인터내셔널 노래를 부르며 해산을 거부하자 본격적인 진압작전이 시작됐습니다. 군대는 땅크와 장갑차를 내몰아 천안문 광장에서 해산을 거부하고 시위를 하던 군중을 깔아뭉개고 총으로 사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작게는 수백명, 많게는 5천에서 1만명의 시위군중이 사망했고 약 3만여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무자비한 진압으로 천안문에서의 시위는 끝났지만 중국 사회주의 력사상 처음으로 수도 베이징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했습니다.
중국인민해방군의 잔인하고 무자비한 무력진압으로 천안문 사태는 끝났지만 중국 공산당과 정부는 천안문 사태를 철저하게 금지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중국의 젊은이들은 중국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주장하며 격렬하게 시위를 벌렸던 천안문사태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세계 2위의 경제강국이 된 중국과 중국 공산당은 더욱 더 철저한 감시와 통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중국인민들의 자유는 북조선에 비해 비할바 없이 높지만 중국의 민주화 투사들은 오늘도 중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고 있습니다.
다음시간에는 천안문 사태의 교훈에 대해 알아봅니다. 지금까지 조선개혁방송의 김승철이였습니다.
입력 : 2019-06-04 (조회 : 72)  |  북한개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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