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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방송

6.4 천안문 사태 특집 : 1회 천안문 사태가 발생한 원인은 무엇인가

방송일 : 2019-06-03  |  진행 :  |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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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4일 중국 수도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인민들의 시위가 무자비하게 진압됐습니다. 땅크와 장갑차를 앞세운 군대는 평화적인 시위를 벌리는 인민들을 깔아뭉개버렸습니다.
이날 중국 정부 발표로는 사망자 3백명 부상자 7천여명이지만 비공식적으로는 5천여명이 사망하고 3만여명이 부상당했다고 합니다. 조선개혁방송에서는 천안문 사태 30주년을 계기로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오늘 첫 번째 시간에는 천안문 사태가 발생한 원인에 대해 알아봅니다.
조선에서 6월 4일은 력사적인 보천보 전투 기념일입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볼 때 6월 4일은 중국 공산당이 완전무장한 군대와 땅크, 장갑차를 앞세워 천안문 광장에서 평화적인 시위군중을 무자비하게 깔아 뭉개버린 날입니다.
6월 3일 밤 천안문 광장에 투입된 군대는 땅크와 장갑차를 동원해 천안문 광장을 포위하고 실탄사격을 시작했습니다. 군대는 6월 4일 새벽에 땅크와 장갑차로 광장에서 시위를 하고 있던 학생들과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천안문 광장의 민주화 투쟁은 실패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0년전 천안문 광장을 가득 채웠던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중국인민들의 시위는 어느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천안문 사태, 중국말로 6.4운동은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시작된 거대한 변화를 중국 공산당이 제대로 이끌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천안문 사태의 시작은 4월 15일 중국 공산당 주석을 지냈던 호요방이 심장발작으로 사망하면서 시작된 추모행사가 공식적인 원인입니다. 호요방은 중난하이에서 소집된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회의에 참가했다가 집으로 돌아도던 중 심장발작이 일어나 4월 15일에 사망했습니다.
천안문 광장에는 호요방 주석을 추모하는 추모비가 세워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정부와 공산당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중국인민들이 호요방을 추모하는 열기가 매우 높았던 것은 그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민주적 개혁파였기 때문입니다. 
1915년에 출생한 호요방은 1928년에 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해 홍군에 참가했던 혁명가입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후 1981년부터 1987년까지 중국 공산당 주석을 하기도 했지만 개혁개방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주장하면서 밀려났습니다.
1989년 당시 중국의 모습은 지금의 북조선과 매우 닮아 있는데 다른 것이 있다면 개혁개방의 차이입니다. 당시 중국에서는 간부들의 부정비리가 매우 심각했고 인플레이션으로 돈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인민들의 불만이 폭발직전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개혁개방으로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인민들과 지식인, 청년 대학생들 속에서는 중국의 민주화에 대한 요구도 높아졌습니다. 중국 공산당과 정부 간부들의 관료주의와 부정부패의 심화로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면서 불평과 불만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현재 중국에서는 꽌시, 즉 사람과 사람 또는 사물과의 관계나 연줄을 의미하는 꽌시가 매우 중요합니다. 중국에서는 국가 제도가 아니라 꽌시로 일을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연줄이나 관계가 중요한데 이것은 관료주의에서 필수적입니다.
중국과 북조선이 모두 당이 통치하는 사회주의이기 때문에 관료주의와 부정비리는 정말로 절대악이라고 할만큼 뿌리깊고 아주 강력합니다. 간부들과 돈 많은 사람들이 경제활동을 주도하고 장사를 하거나 조그마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해도 뢰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1978년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시작하면서 중국은 공산당이 모든 것을 결정하던 것을 행정에 많이 양보했고 인민공사도 해체됐습니다. 개혁개방으로 경제가 발전하고 농업생산도 늘어났지만 이 과정에서 공산당과 정부의 간부들이 결정권을 행사하면서 부정비리도 같이 늘어났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경제는 눈부신 발전을 하기 시작했지만 1986년에 들어서면서 정치와 제도개혁이 따라서지 못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한 나라의 개혁과 개방이 시작되면 정치와 경제, 제도와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개혁이 동시에 진행되여야 안정적인 발전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중국의 경우 정치와 행정에서 사회주의를 유지하면서 시장경제로 개혁하다보니 어느 정도 발전하자 경제발전이 정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점이 1980년대 후반인데 이때에는 당과 정부의 간부들이 경제활동과 관련해 관료주의와 부정비리가 절대적인 수준이였습니다.
당시에 중국사회에서 돌아다니던 말들 중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모택동의 아들은 전쟁터에 나가 전사하고 림표의 아들은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등소평의 아들은 기부금을 받으려 돌아다니고 조자양의 아들은 천연색 텔레비죤을 팔아먹을 궁리만 하고 호요방의 아들은 볼 기회도 없었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고위간부들은 부정비리로 재산을 모았지만 양심적이고 민주주의를 좋아했던 호요방의 아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1987년부터 돈의 가치가 떨어지는 인플레이션이 심각해지면서 사람들이 열심히 일해 돈을 벌지만 남는 돈이 없어지고 생활수준도 떨어졌습니다.
또 농업분야에서 개혁으로 인민공사가 해체되면서 농민들이 열심히 일해 1984년에는 알곡 생산량이 4억톤을 넘어섰습니다. 하지만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알곡생산이 떨어져 4억톤이 되지 못하고 식량을 수입하는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간부들은 관료주의와 부정비리로 날이 갈수록 더 잘살게 되는 반면에 평범한 인민들은 상대적으로 더 못살게 되자 불평과 불만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사회주의를 고집하면서 정치와 행정분야에서 개혁을 하지 않고 통제를 강화했습니다.
1988년과 1989년은 인구 10억이 넘는 중국 사회 전체에 불평과 불만, 분노가 엄청나게 쌓여서 분출구를 찾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 시점에 호요방 전 주석이 중앙정치국회의에 참가했다가 심장발작으로 사망하자 자신들이 편을 들어주었던 호요방에 대한 추모열기가 타올랐던 것입니다.
천안문 광장에서 추모를 하는 모임이 매일같이 이어지면서 추모탑도 만들고 하는 과정에 자연스럽게 불만과 분노가 터져나왔습니다. 처음에 몇천명으로 시작된 베이징 천안문 광장의 추모 행사에는 수십만이 참가했고 전국으로 퍼져가면서 불만과 분노가 조직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호요방의 추모열기가 중국 정부와 공산당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고 드디어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로 이어진 것이 천안문 사태의 동기입니다. 어찌보면 지금의 북조선도 1989년의 천안문 사태 발생직전의 불만과 분노가 차고 넘치면서 분출구를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인민생활은 장마당에 맡겨놓고 국가의 모든 수입은 자신의 절대권력을 다지고 핵과 미싸일을 개발하는데 투자했습니다. 지금 북조선도 1989년의 중국만큼이나 인민들의 불만과 분노가 가득하지만 무자비한 숙청과 처벌로 인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현실은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중국 베이징 천안문 사태가 바로 그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천안문 사태 특집 첫 번째 시간을 마칩니다. 다음 시간에는 천안문 사태의 전개 과정과 민주주의에 대해 알아봅니다.
지금까지 조선개혁방송 김승철이였습니다.
입력 : 2019-06-03 (조회 : 375)  |  북한개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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