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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방송

5.18 민주화운동 특집방송: 꺼지지 않는 민주화의 불꽃 5.18 광주민주화운동

방송일 : 2019-05-18  |  진행 :  |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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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지지 않는 민주화의 불꽃 5.18 광주민주화운동
북조선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남조선에서 본격적인 민주화투쟁의 시작을 알린 5.18광주민주화운동 39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9년전 전라도 광주에서 광주시민과 전라남도 도민들은 당시 신군부 세력 및 계엄군의  진압에 맞서 ’비상계엄 철례, ‘유신세력 척결’을 외치며 민주주의의 쟁취를 위해 항거했던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조선개혁방송은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을 맞이하여 특집방송을 마련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대한민국 남조선을 18년간 통치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을 맞고 사망했습니다. 당시 남한을 통치하던 박정희대통령의 시대에는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이룩하는 성과가 있었지만 개발독재로 민주주의는 발전하지 못하고 침체되어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워진 가운데 군인들이 국가정권을 장악했습니다. 그해 12월 12일,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군대 내부의 사조직인 ‘하나회’를 중심으로 군대내의 반대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이른바 ‘12.12 군사정변’을 일으킵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군부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적인 실세로 등장해 사실상 남조선 정권을 장악하고 비상계엄령을 실시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피살 후 군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고 독재를 하자 많은 재야인사들과 주요 야당의원들은 정권에 맞섰습니다.
여기에 전국의 수많은 대학생들이 정치의 민주화, 군인들의 철수, 학원의 자율화를 외치며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불태우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 5월 10일 23개 대학 대표로 구성된 전국 총학생 회장단은 ‘비상계엄의 즉각해제, 전두환 보안사령관-신현확 국무총리 등 유신잔당의 퇴직’등을 담을 결의문을 포고하고 서울역 앞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습니다.
전두환 정권을 반대하는 시위가 가장 격렬하게 일어난 것은 전라도 광주였습니다. 5월 14일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을 필두로 대학가 및 전남도청 일대에서 거리시위가 벌어진 것입니다.
전두환 계엄사령부는 5월 17일 이미 시행중이던 비상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습니다. 계엄사령부는 모든 정치 활동의 중지시키고 김대중-김영삼 등  유명 정치인을 탄압했고 시위, 언론, 출판보도 및 방송의 사전검열을 실시했습니다. 또한 각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직장이탈 및 태업-파업의 금지 등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유독 광주에서만 시위가 크게 일어나게 된 것은 5.17 계엄령확대조치가 내려진 뒤, 오직 광주에서만 학생들의 시위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에 5월 18일 계엄군은 전남대학교 정문앞에서 등교를 하는 학생들을 막고 항의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을 구타하고 연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학교로 등교하지 못한 학생들은 계엄군의 폭력을 알리기 위해 전남도청으로 몰려들었고 진압봉으로 구타당한 시민들도 뭉치기 시작했습니다. 계엄사령부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 광주지역의 통행금지 시간을 저녁 7시로 조정하였습니다.
다음날인 5월 19일 새벽 3시경 새로 파견된 계엄군이 광주역에 도착하면서 시민들의 저항은 점점 격렬해졌습니다. 광주시내 곳곳에서 시민들과 계엄군 사이에 격렬한 대치와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장갑차와 헬기까지 동원되었으며,  5월 20일 밤 계엄군은 시민들에게 총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살육으로까지 이어진 계엄군의 탄압은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령으로 본격적으로 수행되었고 광주지역 모든 학교들에 휴교령이 내려졌습니다. 계엄군의 탄압이 본격화되면서 전라남도 도청 앞 금남로에는 버스, 화물차, 택시로 구성된 차량시위대가 출현했고 최루탄과 가스로 시민을 저지했습니다.
시민들은 계엄군 탄압을 알리기 위해 광주MBC방송국에 들어가 항의하기도 하였으며, 노동청, 세무서로 몰려가 잔혹한 진압을 규탄하기도 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광주사태가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5월 21일 광주와 외부를 연결하는 전화선을 차단했습니다.
이날 오전부터 광주시내에서는 계엄군에 의한 총성이 울려 퍼졌지만 전남도청을 향한 시민의 물결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시민들은 민주화투쟁의 중심지가 된 도청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었고 결국 군인들과 총격전을 벌렸습니다.
총격에 부상당한 시민들은 거리곳곳에 쓰러졌고 광주시내의 병원은 이송된 환자와 시신으로 넘쳐났습니다.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시민들은 계엄군에 맞서  아시아 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 등의 차량을 확보하고, 광주-전남 일대의   경찰서, 예비군 탄약고에서 무기를 확보했습니다.
이렇게 새로 조직된 ‘시민군’은 점차 시가전으로 확대되어 금남로, 충장로에서 계엄군과의 대치가 이어졌습니다. 5월 21일 계엄군은 전남도청에서 철수했지만 4일동안 일어난 일의 댓가는 너무나도 참혹했습니다. 시민군과 계엄군 모두 서로의 총탄에 사망하면서 광주시내는 그야말로 전쟁터와 다름없이 됐습니다.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사수하려고 지키고 계엄군이 다시 시내로 진입하기까지의 6일이라는 시간동안 광주시내에서는 시민 자치제가 실시되었습니다. 부녀자들은 음식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제공해주었으며, 전남도청 앞에서는 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어 광주에서 일어나는 참상을 알렸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계엄군은 5월 21일부터 5월 26일까지 병력을 보충하고 시 외곽을 철저히 차단하여 광주를 고립시켰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광주지역 이외의 지역에 광주가 ‘치안부재상태’인 곳이라고 보도했고 23일에는 ‘폭도 소탕작전’의 이름하에 시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5월 26일 계엄군은 탱크를 앞에워 도청으로 향했고 새벽 4시에 광주시내로 진입하면서 전남도청에서 시민군과의 교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한 시간 정도 이어진 교전 끝에 시민군은 계엄군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1980년 5월 18일에 시작되어 5월 27일에 종료된 열흘간의 항쟁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광주시민과 대학생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은 전두환  정권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처참하게 마무리되면 엄청난 희생이 발생했습니다.
5.18 광주민주화 투쟁 과정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또 어떻게 희생되었는지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 광주시내에서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 희생된 사람들은 광주광역시 망월동 시립묘지 제3묘역에 안장되어있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전두환 정권의 탄압으로 끝났지만 이후 1980년대 남조선 사회의 민주화운동의 출발점이 됐습니다. 광주에서 시작한 민주화투쟁이 남조선 민주화의 새 시대를 열어놓은 1987년 6월 항쟁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남조선에서 민주화투쟁이 승리하여 군인 독재정치에서 민주정치로 전환된  이후 전두환, 노태우 등은 내란-내란목적살인죄로 처벌을 받았습니다. 현재  남조선에서는 광주에서 일어났던 민주화투쟁을 기념하기 위해 5월 18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고 각종 기념행사를 열고 있습니다.
광주시민들이 보여준 5.18민주화운동정신은 오늘날 세계 곳곳에 중요한 민주화 운동사례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5.18 광주민주화투쟁은 민주주의는 투쟁을 통해서만 달성되며 독재는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다는 평범하지만 변하지 않는 역사의 교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방송을 마칩니다. 청취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입력 : 2019-05-17 (조회 : 148)  |  북한개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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