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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 방송

김정일 생일특집: 2회 김정일은 어떤 지도자였나

방송일 : 2019-02-23  |  진행 :  |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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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인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인민의 안녕과 나라의 발전을 위한 조선개혁방송입니다. 조선개혁방송은 김정일의 생일을 맞으며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오늘 두 번째 시간에는 김정일은 어떤 지도자였는가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위대성과 업적에 대한 선전선동 그리고 학습과 강연회 등은 올해에도 여전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인민들을 위한 지도자였는지를 객관적으로, 랭정하게 평가하는 자리는 단 한번도 없습니다.
김정일 통치시절 최악의 시기는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서 시작된 고난의 행군시기로 3백만명이 넘는 인민들이 아사자가 발생했던 굶어죽은   사변입니다. 고난의 행군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김정일은 강성대국을 건설하겠다며 2012년 목표시기까지 설정했지만 그날을 불과 열흘정도 앞두고 사망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죽자마자 자동으로 후계자가 되어 8년째 통치를 하고 있는 김정은 위원장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그는 그의 아버지를 이어 비슷한 모습으로 북조선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어떤 지도자였는가를 알아보는 것은 조선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일 것입니다.
김정일이 어떤 지도자였는가 하는 것은 그의 정치 과정과 결과를 객관적이고 랭정하게 들여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가 되었던  과정, 그리고 후계자가 되어 북조선을 통치하고 아버지 김일성주석 사망후의 통치시기까지 살펴보면 어떤 지도자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김정일은 10대의 어린 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아 여러정책에 간섭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20대에 들어서면서 자동적으로 당연하게 후계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김일성 주석이 처음에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했던 아들은 김정일이 아니라 두 번째 부인 김성애의 맏아들 김평일이였다고 합니다.
김평일은 키도 크고 잘생긴 아버지를 닮았는데다가 어머니인 김성애가 조선녀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권위도 아주 상당했습니다. 1960년대 말, 1970년 경에는 조선녀성동맹 위원장 김성애의 권위가 로동당의 권위와 맞먹을 정도로 높았습니다.
이 시기에 김정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김성애와 그 아들 김평일을 곁가지로 만들어 버리고 후계자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자신이 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권력을 빼앗아야 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김정일이 아버지 김일성주석의 후계자로 본격적이고 공개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한 것은 1972년으로 ‘70일전투속도’와 ‘3대혁명소조운동’입니다.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6.25전쟁 복구자금으로 눈부시게 발전하던 북조선의 경제발전이 1970년부터 침체하기 시작했습니다.
1972년 북조선 경제가 처음으로 국가계획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자 김정일은 “당에서 맡아 하겠다”고 하면서 70일전투를 조직했습니다. 하지만 이 70일전투로 인해 북조선의 계획경제는 만신창이가 됐고 그 이후로 1980년대말 파산상태에 이를때까지 경제가 제 기능을 못했습니다.
3대혁명소조운동은 조선로동당 내에 만들어진 김정일의 친위대, 돌격대로  당내의 강력한, 또다른 하나의 권력조직이었습니다. 1970년대 중반과 후반경 시, 군, 구역 3대혁명소조사업부장은 군이나 구역당 책임비서를 좌천시킬 수 있을 정도로 권한이 막강했습니다.
이때에 김정일이 한 유명한 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동무들이 열가지를 하고 싶어도 당에서 한가지를 하라고 하면 하나만 해야 한다”입니다. 다시  말해 김정일이 하라는 대로 하라는 것이였는데 이때 ‘덕성실기’도 나오고 하면서 김정일의 권위는 대단했습니다.
김정일이 만든 당의 유일사상체계 10대원칙과 당의 유일적지도체제는 가장 강력한 통제수단이 되었습니다. 모든 정보가 김정일에게 집중되고 김일성 주석에게는 근심을 끼쳐드린다면서 보내지 않았습니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김정일은 조직비서가 되어 당과 정부, 근로단체를 완전하게 장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아버지 김일성과의 다툼이 시작됐습니다. 내각과 당을 비롯한 모든 국가조직에서 격리된 김일성 주석은 좋은 보고만 듣다보니 현실을 모르는 꼭두각시처럼 됐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80년대 초에 건설한 남포갑문은 김정일이, 태천발전소는 김일성 주석이 관심을 가진 것이였습니다. 당시 태천발전소의 기술자와 기능공, 설비자재가 모두 남포갑문으로 투입되었지만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김일성 주석은 1986년도에야 알고 대노하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에 김일성 주석은 순천비날론 공장 건설에 많은 관심을 가졌지만, 아들 김정일 조직비서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집중했습니다. 많은 자본과 노동력이 투입되었지만 완공되기도 전에 국가예산은 바닥나버렸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남조선 88 서울 올림픽에 대응하여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입된  학생축전을 감행한 결과 1980년대에 북조선 경제는 거의 파산상태에 처했습니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기 전에 이미 북조선 경제는 전반적으로 중단상태였습니다.
1991년 12월 24일 김정일은 자신의 어머니 김정숙 생일날에 김일성에게서 최고사령관자리를 빼앗았습니다. 이날 김일성 주석은 밤늦게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올라가 몇시간을 울었다고 했는데 김일성 사망 후 이붓어머니 김성애는 가택연금을 당했습니다.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에 대한 애도기간을 100일로 정했지만 자신의 권력이 안정되지 않자 그 기간을 1년, 3년으로 연장했습니다. 김일성 주석 사망 직후 평양에서는 쿠데타 설도 돌았고 김일성 주석 사망의 원인이 김정일 때문이라는 소문도 돌았습니다.
이런 정치적 불안정 때문에 김정일은 애도기간에 간부들을 꼼짝 못하게 했으며, 그 결과 행정이 마비되면서 국가경제관리기능이 정지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것입니다. 1995년과 그 이듬해까지 수십만의 인민들이 굶어죽으면서 무정부 상태가 되어가자 김정일은 총소리를 울려야 되겠다면서 시작한 것이 선군정치입니다.
그리고 고난의 행군이 좀 잦아들 무렵이 되자 김정일은 2012년까지 강성대국을 건설한다는 거대한 거짓말을 시작했습니다. 고난의 행군이 끝나고 원인과 책임에 대한 론쟁과 소문이 일기 시작하자 무마하려고 시작한 것이 바로 심화조사건입니다.
이처럼 김정일 시대는 가난과 고통, 3백만명이 굶어죽는 고난의 행군, 각종 정치적 사건으로 인한 집단적 처형과 처벌이 란무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민들의 생활은 최악으로 변했으며, 김정일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1970년대 초부터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하기 전까지 북조선은 계속 내리막길을 걸었고 인구까지 감소하는 비극이 련속이였습니다. 이것은 김정일이라는 지도자는 자신의 절대권력 하나만을 위해 조선을, 인민을 착취하고 탄압한 잔혹한 독재자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김정일 통치에서 얻을 교훈은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봅니다. 청취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입력 : 2019-02-22 (조회 : 127)  |  북한개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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