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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온 소식

독일-프랑스의 새 우호협정 통해 배워보는 화해의 교훈

방송일 : 2019-02-15  |  진행 : Charles V. Denkowski · 경덕현  |  시간 : 마지막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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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북한개혁방송 청취자여러분, 제 이름은 찰스 폰 덴코프스키입니다. 저는 독일에서 왔습니다.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보내는 제 방송의 1월 방송을 듣고 계십니다. 오늘 방송에서는, 베를린에서 열린 핸드볼 세계선수권 남북한 단일팀의 감동적인 성공이야기,
독일 - 프랑스 화해와 협력 사례를 들어 남북조선에 제시할 수 있는 모델에 대해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베를린에서 열린 핸드볼(송구) 세계 선수권 소식입니다.

핸드볼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의 남북한 단일팀은 베를린의 관중들로부터 큰 성원을 받았습니다.
약 한달전인 2019년 1월 10일부터 27일까지 남자 핸드볼(송구) 세계선수권대회가 베를린 및 다른 독일 도시, 그리고 이웃나라 덴마크의 2개 경기장 등에서 열렸습니다. 전 세계 남자 핸드볼 대화 역사상 처음으로 남북 단일팀이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1월 10일에는 개최국 독일의 수준 높은 팀을 상대로 훌륭하게 경기를 진행했습니다. 독일이 이기기는 했지만 관중들의 마음속에는 남북 단일팀이 진정한 승자였습니다.
그리고 1월 14일 한국 팀은 프랑스와 대전했습니다. 32:23으로 프랑스가 이겼는데요, 이 경기는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프랑스는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독일의 적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양국은 긴밀한 협력 관계에 있으며 공동으로 운영하는 군부대, 그리고 공동으로 개최하는 정부 회의가 있을 정도니 말이죠.

독일과 프랑스 간의 매우 긴밀한 협력 관계는 과거 양국 간 세 차례의 대규모 전쟁, 고통과 굴욕도 있었던 양국 관계의 역사를 볼 때 전혀 당연하거나 자명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파트너십은 수년간의 화해를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왜냐하면 1870 ~ 1945년까지 독일과 프랑스는 거의 80년 동안 적대 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오랜 시간동안 적대관계를 유지했던 남북한이 서로 가까워지려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핸드볼 대회소식을 마무리 짓고, 지금부터 제 2차 세계 대전 후 프랑스와 독일 간의 화해와 용서에 대해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어쩌면 지금 들려드릴, 적대 이후의 프랑스 독일의 화해에 대한 사례가 미래 남북한 관계에 중요하게 고려할 만한 예시로 작용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프-독간 화해 - 미래 협력을 기반으로 한 남북한의 긴장 완화 (데탕트) 및 화해 정책의 사례를 제시할 수 있는 모델

19세기 이래로 독일과 프랑스는 1945년 5월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유럽의 두 열강 간의 적대감과 경쟁의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역사를 공유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소국들의 연합으로 존재했던 독일이 1870/1871년에 단일 제국으로 수립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로서 프랑스의 근대국가와 경쟁하기 시작했습니다. 519,000명의 독일군과 336,000명의 프랑스군이 전투했던 제 1차 보불전쟁에서도 이러한 면이 드러납니다.
1870년 8월 독일의 선제공격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전쟁 초기에 몇몇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1870년 8월 16일 독일의 제 2부대가 비옹빌 (Vionville) 전투에서 첫 번째 주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8월 18일에는 전쟁 전체에서 가장 큰 전투였던 그라블로트 (Gravelotte)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1870년 9월 2일, 프랑스군은 스당(Sedan)에서 패배하며 독일군의 승리를 결정짓는 전투에서 큰 손실을 겪었습니다. 1870년 10월 27일, 프랑스 라인군이 메츠(Metz)에서 항복했습니다. 대략 170,000명의 군인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파리는 대규모 포격 끝에 1871년 1월 28일에 항복하고 같은 날 휴전 협정에 서명했습니다. 1871년 5월 10일 프랑크푸르트 평화조약에서 프랑스는 알자스와 로레인의 일부를 독일에 양도했습니다. 또한 50억 프랑의 전쟁 배상금을 냈습니다. 또한 1871년 1월 18일 빌헬름 1세는 베르사이유 궁전의 거울의 홀에서 자신이 독일 제국의 황제임을 선포했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이 수치에 더하여 독일에의 국가 영토의 상실과 패배는 깊은 굴욕을 의미했습니다. 이후 제 1차 세계 대전 때까지 이 지역의 수복은 프랑스 외교 정책의 핵심 목표를 이루게 됩니다.
독일이 항복한 후 프랑스를 비롯한 연합국은 바로 이것을 쟁취합니다. 1차 대전에 대한 휴전 협정은 1919년 11월 프랑스 콩피엔느 (Compiegne)의 한 열차칸 안에서 체결되었습니다.

휴전 협정에 이은 평화 조약은 1871년에 독일 황제가 대관된 바로 그곳, 베르사이유에서 독일과 연합 3국에 의해 체결됩니다. 베르사이유 조약의 결과로 프랑스는 알자스와 로레인을 수복하였습니다. 독일 제국은 항의했지만 조약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조약은 독일에서는 인용하자면 “굴욕 늑약”으로 받아들여져 군사적, 문화적, 도덕적, 경제적으로 자랑스러웠던 국가가 그 모든 면에서 쇠퇴하게 되는 원흉으로 인식되었습니다. 1919년 이후 수년간 전쟁의 여파로 독일은 굶주림과 실업, 치명적인 수준의 인플레이션으로 고통 받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프랑스에 대한 증오와 보복에 대한 열망을 조장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독일과 프랑스 간 세 번째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1940년 6월에 나치 독일은 프랑스를 침공합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세 번째 프랑스-독일 전쟁입니다. 독일인들과 프랑스인 부역자들은 남부의 괴뢰정부를 통해 프랑스 전체를 지배했습니다. 알자스와 로레인(독일명 엘사스와 로트링엔)은 다시 독일의 차지가 됩니다. 히틀러는 1940년 6월 알자스와 파리를 직접 방문합니다. 그는 파리의 에펠 탑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그것은 프랑스인들에게는 깊은 굴욕을 뜻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또한 프랑스의 항복 선언이 1919년 독일이 패전조약에 서명했던 바로 그곳, 콩피엔느의 열차 차량에서 서명되도록 주문했습니다.

더불어 독일인과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깊은 증오에 반응하여 독일군은 비밀경찰을 동원해 유대인을 포함한 수많은 프랑스인을 대상으로 수사를 벌입니다.
1940년 독일의 침략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을 체포하고, 나치 정부가 독일 및 동유럽 지역에 세운 수용소들에 강제 추방을 시작합니다. 이렇게 프랑스 국민들은 주권 상실 외에 다른 방법으로도 나치 독일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북한의 보위성과 흡사 한 나치 비밀 경찰은 모든 연령대와 성별의 프랑스 유대인들을 고문하고 납치했습니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비 유대인에게도, 프랑스의 독일 점령군은 전쟁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나치 독일이 점령하는 동안 프랑스 내 저항 운동인 레지스탕스, 파르티잔 등이 대두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활동은 국제법상 합법적인 국민권 운동이었지만, 나치 독일은 프랑스 민간인에 대한 보복을 진행했습니다. 예를 들어, 1944년 6월 10일, 나치의 SS 부대는 프랑스의 오라두르쉬르글란(Oradour-Sur-Glane) 대학살 당시 아기 또는 노인을 불문하고 거의 모든 인구를 살해했습니다. 642명의 민간인이 국제법에 아랑곳 않고 살해당했습니다. 생존자는 6명 뿐이었습니다. 마을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동맹국이 파리로 향한 1944년 여름, 히틀러는 파리의 완전한 파괴를 명령했으나 독일 지휘관은 이를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4년 8월 말 프랑스에서 나치 독일이 물러날 때까지 많은 잔학 행위, 유대인 추방, 프랑스 땅에 대한 파괴 행위로 인해 많은 프랑스인의 마음에 독일인 및 모든 독일적인 것에 대한 증오가 심화되었습니다.

요약하자면 : 1870년에서 1945년까지 독-프 관계를 정의한 정치적 수단은 경쟁, 적대, 전쟁이었습니다.
첫 번째 프-독 전쟁, 즉 보불전쟁의 결과는 프랑스 인들의 수치스럽고 뿌리 깊은 굴욕이었습니다. 국가의 사회적 얼굴에 먹칠을 한 것입니다. 민중들 사이에 독일에 대한 깊은 증오가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1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 조수가 역전되어, 프랑스는 알자스와 로레인을 수복합니다. 이번에는 프랑스인들이 독일에게 굴욕을 안기고 서방 연합국과 함께 독일에 수년간 빈곤과 혼란으로 인한 정치적 무질서 상태가 찾아오게 만듭니다.
1940년 6월 2차 세계 대전 중에 독일은 프랑스에 복수를 자행합니다. 이는 프랑스에 다시금 굴욕을 안겨주었으며 동시에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전쟁 범죄, 즉 유대인의 수용소 추방 및 학살을 일으킵니다.

1870년부터 1945년까지 뿌리 깊게 이어진 프-독 간의 고통과 굴욕, 분쟁의 역사로부터 과연 화해, 심지어는 협력의 시대가 도래하는게 가능했을까요? 답은 ‘예’ 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적대국이었지만, 친선 의지를 가진 정치인들이 처음으로 서로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에서는 1945년 전쟁이 끝나고 샤를드골 장군이 경쟁보다는 정부 간 협력이라는 생각에 입각하여, 통일 된 유럽의 평화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1958년 독일의 콘라드 아데나워 (Konrad Adenauer) 수상을 프랑스의 시골 지역으로 초청했습니다.
아데나워 수상은 2차 세계대전 중 나치당원이 아니었고, 이전의 적이었던 양국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프랑스 간 우방 관계가 구축된것입니다. 5년 후, 양국은 엘리제 조약을 통해 협력 관계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프랑스 드골 은 오랜 적국 간의 화해 외에도, 유럽 국가가 연합하여 미국에 대적할 만한 정치적 행사력을 갖는 것을 추구했습니다. 엘리제 조약은 그런 의미에서 성공했을 뿐 아니라,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규모의 독-프 협력 관계를 구상했습니다. 이 협정에 뒤이어 1963년 여름에는 독-프 청년협회가 창설되었습니다. 이후 수많은 자매 도시 결연 및 학교와 모임 간의 양국 자매결연이 생겼습니다. 젊은 독일인과 프랑스 인들은 외국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대한 증오는 해마다 줄어들었죠.

1988년 헬무트 콜 (Helmut Kohl) 독일 총리와 프랑소와 미테랑 (Francois Mitterrand) 대통령은 국방 이익과 경제, 금융 및 통화 정책 조정을 위한 엘리제 조약 협의회를 임명했습니다.
1989년에 두 나라는 독일 - 프랑스 보병 군사부대를 독-프 관계 역사상 최초의 공동 군부대로 설립했습니다. 이 부대에서는 프랑스인과 독일인이 전세계에서 함께 근무합니다. 독일 - 프랑스 여단은 세 번의 전쟁을 벌이고 긴 적대 역사를 가진 양국 간의 화해의 가장 강력한 상징 중 하나입니다.

2001년 이래로 독일 정부와 프랑스 정부 간 정상회담이 8 주마다 열렸습니다.
엘리제Elysee 조약 40주년인 2003년, 프랑코 - 독일 장관급 회담 첫 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베르사이유에서 프랑스와 독일 의회가 공동으로 개회했습니다. 양국은 또한 프랑스 - 독일 협력 대표를 임명했습니다. 2003년에는 독일과 프랑스가 문화 정책을 위한 공동 재정 기금을 조성했습니다. 이 기금은 독-프간 문화 사업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공동 선언에 기초하여 1월 22일이 독일 - 프랑스의 날로 선언되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2018년 11월 10일 독일 총리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프랑스를 방문했으며, . 그녀는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 (Emmanuel Macron)과 함께 1940년까지 프랑스에 가해졌던 독일의 군사 행동을 기억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프랑스의 콩피엔느에서는 기념식이 있었는데, 이곳은 1919년과 1940년에 각국에 굴욕적인 패배조약이 서명된 곳입니다. 독일의 제1국영티비의 뉴스에서는 이 소식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이하 인용):
총리는 콩피엔느에서의 협동 행사를 “감동적”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수많은 사람을 만났으며 그들이 메르켈 자신과 마크롱에게 평화는 당연한 것이 아니며 사람들이 노력하여 쟁취해야 하는 것임을 다시금 알려줬다고 말했다. 마크롱의 경우에는 마크롱과 메르켈의 공동 방문으로 하여금 이 장소가 독-프 간“복수의 장소”에서 “궁극적인 화해의 장소”로 변화하기를 바란다는 입장을 보였다.

북조선 청취자 여러분,
6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독일과 프랑스 간의 화해의 징표는 청년 교류, 학생 교류, 대학생 교류, 마을 자매결연, 문화 교류 및 독일 - 프랑스 군 여단 설립과 같은 많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독-프 정부 간 협의를 통해 국가 원수와 장관들이 모인 회의가 열렸습니다.

북조선 청취자 여러분,
남북한 간 평화 조약에 더하여 남북 양측의 기념 행사를 공동 개최하는 방안은 어떨까요? 엘리제 조약을 모델로 삼아 남북 간의 화해 조약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조약을 통해 정치적으로 필요하고 현실적인 다양한 협력의 형태를 구체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화, 스포츠, 환경 보호, 의학, 그리고 어쩌면 심지어 안보 정책 분야에서 : 북한과 한국이 유엔 평화유지군, 그 유명한 푸른 헬멧에 공동 부대를 통해 참여하는 것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일까요?

평양 정부가 권력에 대한 욕심을 넘어서 협력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남북한 간의 화해도 가능할 것입니다. 남북 간의 화해에는 한국 전쟁과 인권 침해, 정치범 수용소를 포함한 북한 주민의 계속되는 억압 문제가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독일 - 프랑스 화해에 있어 중요한 주제 역시 프랑스에의 독일의 전쟁범죄 및 비밀경찰 활동이었습니다.

따라서 한반도 화해의 주요 주제는 한국 전쟁의 고통과 북한에 여전히 존재하는 정치범 수용소와 강제 노역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수십 년 간 북한의 수많은 가정들은 출신성분에 상관없이 이런 수용소에서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 고통이 해결될 때에 만, 남북한 간의 신뢰 협력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독일과 프랑스 간 화해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이지 않을까요?

북조선 청취자여러분 북한개혁방송 2월방송의 베를린에서 온소식을 방송한 찰스폰 덴코프스키였습니다. 춥지만 따뜻한, 아름다운 겨울을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독일에서 북조선에 대한 일들을 대하는 우리들은 매일 여러분들을 생각하며, 조선반도의 협력과 모든 인권의 타당성에 대한 조화로운 미래를 언제나 바라고 있습니다.

3월 방송에서 여러분은 베를린에서 온 소식을 다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독일어 원문>

Anjeong Hashimnika, sehr geehrte Horerinnen und Horer des North Korea Reform Radio in
Nordkorea.
Je ireumeun Charles A. von Denkowski imnida. Jeoneun Berlin Togil e-seo wasseumnida.
Sie horen die Januar-Ausgabe meines Berichtes aus Berlin, der Hauptstadt Deutschlands.
Der Inhalt meiner heutigen Sendung: Neben dem Herzenserfolg der gemeinsamen koreanischen
Mannschaft auf der Handballweltmeisterschaft in Berlin mochte ich sie uber die Deutsch-
Franzosische Versohnung und Kooperation als einem Beispiel fur beide Koreas informieren.
Zunachst zur Handballweltmeisterschaft in Berlin.
Gemischt-koreanisches Team bei der Handballweltmeisterschaft der Manner wird vom
Publikum in Berlin gefeiert
Vom 10 bis 27.09.2019 findet in Berlin, in anderen deutschen Stadten sowie im Nachbarland
Danemark an zwei Spielorten die Handballweltmeisterschaft der Manner statt. Es nahm
erstmals in der Geschichte des Weltmannerhandballs ein gemischt nord- und sudkoreanisches
Team teil. Am 10. Marz spielte dieses Team grandios gegen den sehr starken Gastgeber
Deutschland. Deutschland siegte, aber in den Herzen der Zuschauer gewann das gemischt-
koreanische Team.
Und am 14. Januar spielte das Korea-Team gegen Frankreich. Die Franzosen gewannen mit 32
zu 23, aber das Spiel hat eine ganz besondere Bedeutung. Denn Frankreich war bis zum Ende
des 2. Weltkrieges der Erzfeind Deutschlands. Heute sind beide Lander so enge Partner, dass
es eine gemeinsame militarische Einheit sowie gemeinsame Regierungssitzungen gibt.
Verehrte Horerinnen und Horer in Nordkorea,
die heute sehr enge Partnerschaft zwischen Deutschland und Frankreich ist nicht
selbstverstandlich, wenn man sich die Geschichte der Deutsch-Franzosischen Beziehungen vor
Augen fuhrt, die drei große gegeneinander gefuhrte Kriege, auf beiden Seiten viel Leid und
Demutigungen, beinhalten. Die heutige Partnerschaft war nur durch langjahrige Aussohnung
moglich, denn von 1870 bis 1945 waren Deutschland und Frankreich fast 80 Jahre verfeindet.
Zwei langjahrige Feinde, die beiden koreanischen Staaten, nahern sich derzeit aneinander an.
Ich mochte Sie daher nachfolgend uber die nach dem 2. Weltkrieg erfolgende Annaherung und
Aussohnung zwischen Frankreich und Deutschland informieren. Vielleicht enthalt mein
Bericht uber die auf diese Feindschaft folgende Versohnung fur Sie einige Beispiele, welche
fur das Verhaltnis zwischen Nordkorea und Sudkorea in der Zukunft wichtig werden konnten.

Deutsch-Franzosische Versohnung ? ein Modell, aus dem sich Beispiele fur eine auf
zukunftige Kooperation ausgerichtete Entspannungs- und Versohnungspolitik beider
Koreas entnehmen lassen
Deutschland und Frankreich teilen seit dem 19. Jahrhundert eine Geschichte, die bis zum Ende
des Zweiten Weltkrieges im Mai 1945 als Erbfeindschaft und naturliche Konkurrenz zweier
Mittelmachte Europas verstanden werden kann.
Mit der Grundung des deutschen Reiches 1870/1871 gab es eine nach vielen Jahren des
Bestandes deutscher Lander nebeneinander eine starke zentrale Institution, die mit dem
franzosischen Nationalstaat zu konkurrieren begann. Es kam zum ersten deutsch-franzosischen
Krieg. 519.000 deutsche Soldaten standen 336.000 Franzosen gegenuber. Der deutsche Angriff
verlief ab August 1870 erfolgreich. Nach ersten Erfolgen gelang der deutschen II. Armee am
16. August 1870 bei Vionville der Sieg in der ersten großen Entscheidungsschlacht. Am 18.
August erfolgte bei Gravelotte die großte Schlacht des gesamten Kriegs. Am 2. September 1870
erlitten die Franzosen in der Schlacht von Sedan eine fur den Sieg des Deutschen Reiches
entscheidende Niederlage. Am 27. Oktober 1870 ergab sich die franzosische Rheinarmee in
Metz. Ca. 170.000 Soldaten gerieten in Gefangenschaft. Paris kapitulierte nach schwerem
Beschuss am 28. Januar 1871, am selben Tag wurde ein Waffenstillstand unterzeichnet. Im
Frieden von Frankfurt vom 10. Mai 1871 trat Frankreich das Elsass und Teile von Lothringen
an Deutschland ab. Es zahlte auch eine Kriegsentschadigung von funf Milliarden Franc. Schwer
wog auch, dass sich am 18. Januar 1871 im Spiegelsaal des franzosischen Kaiserschlosses von
Versailles Wilhelm der I. zum deutschen Kaiser ausrufen ließ. Fur Frankreich bedeuteten neben
dieser Schmach auch die Verluste von Staatsgebiet an Deutschland und die Kriegsniederlage
eine tiefe Demutigung. Von da an machte es die Zuruckerlangung dieser Gebiete zu einem
zentralen Ziel franzosischer Außenpolitik - bis zum Ersten Weltkrieg.
Denn diesen gewannen die Westalliierten mit den Franzosen, wahrend Deutschland
kapitulierte. Unterzeichnet wurde der Waffenstillstand im November 1919 in einem
Eisenbahnwaggon im franzosischen Compiegne.
Den auf den Waffenstillstand folgenden Friedensvertrag schlossen die drei Westmachte und
ihre Verbundeten mit Deutschland in Versailles, wo sich 1871 der deutsche Kaiser hatte kronen
lassen. Als Kriegsfolgen des Versailler Vertrages holte sich Frankreich das Elsass und
Lothringen zuruck. Das Deutsche Reich protestierte, zeichnete aber den Vertrag.
Diesen Vertrag nahm man in Deutschland uberwiegend als das, Zitat, ?Schanddiktat“ von
Versailles wahr, das als Kriegsfolge den Niedergang einer stolzen Nation auf allen Ebenen,
militarisch, kulturell, moralisch und wirtschaftlich, herbei fuhrte. Hungersnote und ein Heer
von Arbeitslosen sowie eine dramatische Geldentwertung plagten die Deutschen als
Kriegsfolgen in den Jahren nach 1919. Naturlich beforderte dieses den Hass auf Frankreich und
den Wunsch nach Vergeltung. Zu ihr kam es dann im dritten Deutsch-Franzosischen Krieg:
Denn im Juni 1940 uberfiel das damalige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land Frankreich. Es
kam zum dritten deutsch-franzosischen Krieg. Ganz Frankreich wurde von den Deutschen
beherrscht, im Suden mit Hilfe von franzosischen Kollaborateuren. Elass und Lothringen fielen
wieder an das Deutsche Reich. Hitler selbst besuchte das Elsass und dann Paris im Juni 1940.
Er ließ sich am Eiffelturm in Paris fotografieren, was eine tiefe Demutigung fur die Franzosen
war. Und die Erklarung der Kapitulation der Franzosen ließ er deren Generale in genau dem
Eisenbahnwaggon in Compiegne unterzeichnen, in welchem Deutschland als Kriegsverlierer
1919 die Waffenstillstandvereinbarung unterzeichnet hatte.
Zusatzlich tiefen Hass in Frankreich auf Deutsche und Deutschland erzeugte die
geheimpolizeiliche Verfolgung unzahliger Menschen in Frankreich, darunter dessen Juden:
Denn nach dem deutschen Einmarsch 1940 begann einige Zeit spater die Erfassung der in
Frankreich lebenden Juden und dann ihre Deportation in von den Nazideutschen in Osteuropa
und Deutschland errichteten politischen Straflager, der Konzentrationslager. Die Bevolkerung
Frankreichs wurde so auf eine weitere Weise neben dem Uberfall auf ihr Land Opfer der
Nazideutschen. Die Geheime Staatspolizei, sie ahnelt der Bowiseong Nordkoreas ein wenig,
folterte und verschleppte franzosische Juden aller Altersgruppen und Geschlechter.
Doch nicht nur an Juden, auch an nicht-Juden verubten die deutschen Besatzer in Frankreich
Kriegsverbrechen. Denn wahrend der Besatzung durch die Nazideutschen bildete sich eine
Widerstandsbewegung in Frankreich, die Resistance, Partisanen. Als Reaktion auf ihren
volkerrechtlich legitimen Widerstand gegen die deutschen Besatzungstruppen verubten diese
wiederum Repressalien gegen die Zivilbevolkerung Frankreichs. Zum Beispiel ermordeten
Einheiten der Waffen-SS beim Massaker im franzosischen Ort Oradour-Sur-Glane am 10. Juni
1944 fast die gesamte Bevolkerung, egal ob Babys oder Senioren. 642 volkerrechtswidrig
Ermordete waren zu beklagen. Es gab nur sechs Uberlebende. Das Dorf wurde vollig zerstort.
Und im Sommer 1944, als die Alliierten auf Paris vorruckten, befahl Hitler die Zerstorung von
Paris, die aber vom deutschen Befehlshaber nicht ausgefuhrt wurde. Dennoch hatten bis zum
Ruckzug Nazideutschlands aus Frankreich Ende August 1944 viele Greueltaten, Deportationen
von Juden und ein zerstorerischer Umgang mit Frankreich den Hass vieler Franzosen auf
Deutsche und alles Deutsche vertieft.
Sehr geehrte Horerinnen und Horer in Nordkorea,
fassen wir zusammen: Die Deutsch-Franzosischen Beziehungen kannten von 1870 bis 1945
Konkurrenz, Feindschaft und Krieg als Mittel der Politik. Die Folgen des ersten deutsch-
franzosischen Krieges waren tief sitzende Demutigungen der Franzosen, Verletzungen ihres
sozialen Gesichts also. Hass gegen Deutschland innerhalb der Bevolkerung war die Folge.
Doch das Blatt wendete sich am Ende des I. Weltkrieges: Frankreich eroberte das Elsass und
Lothringen zuruck. Hier demutigten die Franzosen die Deutschen und trugen mit den
Westalliierten zusammen dazu bei, dass in Deutschland Hunger und viele Jahre durch Armut
und Chaos gefordertes politisches Wirrwarr herrschte.
Die deutsche Rache kam im II. Weltkrieg im Juni 1940 nach Frankreich zuruck. Es kam zu
einer erneuten Demutigung Frankreichs sowie zu Kriegsverbrechen in einem vorher bei
Deutsch-Franzosischen Kriegshandlungen nie dagewesenem Umfang, darunter auch zur
Vernichtung franzosischer Juden in Kontentrationslagern.
Konnte aus so einer wie beschrieben Leid und Demutigung uber beide Volker bringenden
deutsch-franzosischen Konfliktgeschichte, die von 1870 bis 1945 andauerte, jemals eine
Aussohnung, ja eine Kooperation, entstehen? Ja. Weil Politiker guten Willens beider lange
Jahre verfeindeter Lander erstmals Schritte aufeinander zuzugehen begannen.
In Frankreich vertrat der General Charles de Gaulle nach dem Kriegsende 1945 seine Vision
eines geeinten Friedens-Europas, fußend auf der Idee von zwischenstaatlicher Kooperation statt
Konkurrenz. 1958 lud er den deutschen Bundeskanzler Konrad Adenauer auf seinen Landsitz
nach Frankreich ein. Adenauer, der im 2. Weltkrieg kein Nationalsozialist war, und der
ehemalige Feind verstanden sich. Die deutsch-franzosische Freundschaft wurde begrundet. 5
Jahre spater stellten beide Lander ihre neue Kooperation auf Grundlage eines Vertrages, des
Elysee-Vertrages. De Gaulle verfolgte neben einer Versohnung alter Feinde auch das Ziel, mit
Deutschland zusammen die Position Europas gegenuber den USA zu starken. Der Elysee-
Vertrag zielte auch darauf ab, das aber auch auf der Grundlage einer starken niemals
dagewesenen deutsch-franzosischen Kooperation. Auf diesen Vertrag folgte im Sommer 1963

das Grundungsabkommen fur das Deutsch-Franzosische Jugendwerk. In der Folgezeit
entstanden zahlreiche Stadtepartnerschaften sowie Partnerschaften zwischen Schulen und
Vereinen. Junge Deutsche und Franzosen lernten sich jeweils im anderen Land kennen. Der
Hass der Vergangenheit wurde auf diese Weise Jahr fur Jahr weniger.
1988 setzten der deutsche Bundeskanzler Helmut Kohl und der franzosische Staatsprasident
Francois Mitterrand in Erganzung des Elysee-Vertrages politische Rate fur die Abstimmung
von Verteidigungsinteressen und der Wirtschafts-, Finanz- und Wahrungspolitik ein.
1989 stellten beide Lander die Deutsch-Franzosische Militarbrigade der Infanterie, als die erste
gemeinsame militarische Einheit der Geschichte ihrer Beziehungen auf. In dieser Einheit dienen
Franzosen und Deutsche in aller Welt gemeinsam. Die deutsch-franzosische Brigade ist eines
der starksten Symbole der Aussohnung zwischen beiden lange Jahre verfeindeten Staaten, die
ja drei Kriege gegeneinander fuhrten.
Seit 2001 finden alle 8 Wochen Treffen zwischen den Regierungschefs von Deutschland und
Frankreich statt.
Im Jahr 2003, zur 40-Jahr-Feier des Elysee-Vertrags, fand das erste Treffen des Deutsch-
Franzosischen Ministerrates statt. Es gab eine gemeinsame Sitzung des franzosischen und des
deutschen Parlamentes in Versailles. Auch ernannten beide Lander jeweils einen Beauftragten
fur die deutsch-franzosische Zusammenarbeit. 2003 wurde von Deutschland und Frankreich
auch der gemeinsam finanzierte Fonds fur Kulturprogramme errichtet. Dieser Fonds fordert
deutsch-franzosische Kulturprojekte. Aufgrund der Gemeinsamen Erklarung wurde der 22.
Januar zum Deutsch-Franzosischen Tag erklart.
Zuletzt besuchte die deutsche Bundeskanzlerin Dr. Angela Merkel Frankreich am 10.
November 2018. Dabei unterstrich sie zusammen mit dem franzosischen Prasidenten
Emmanuel Macron die Bedeutung des Gedenkens am kriegerische Handlungen Deutschlands,
das Frankreich ja zuletzt 1940 uberfallen hatte. Es fand eine Gedenkzeremonie im
franzosischen Compiegne statt, wo ja jeweils 1919 und 1940 die jeweils andere Seite
demutigende Kapitulationserklarungen gezeichnet wurden. Die deutsche Tagesschau in Ersten
Deutschen Fernsehen berichtete wie folgt uber das Treffen, ich zitiere daraus:
Die gemeinsame Zeremonie in Compiegne bezeichnete die Kanzlerin als "bewegend". Sie sei
mit vielen Personlichkeiten in Kontakt gekommen, die ihr und Macron noch einmal

klargemacht hatten, dass Frieden nicht selbstverstandlich sei, sondern die Menschen dafur
weiter arbeiten mussten. Aus Macrons Umfeld hieß es, der historische Ort solle durch den
gemeinsamen Besuch mit Merkel vom "Ort der Revanche" zum Ort der "allerletzten
Versohnung" zwischen Deutschland und Frankreich werden.
Verehrte Horerinnen und Horer in Nordkorea,
ein Zeichen der Versohnung zwischen Deutschland und Frankreich sind auch seit mehr als 60
Jahren eine Vielzahl von Jugendaustauschen, Schuleraustauschen, Studentenaustauschen,
Stadtepartnerschaften, Kulturaustauschen sowie der Aufbau der Deutsch-Franzosischen
Militarbrigade. Auch finden deutsch-franzosische Regierungskonsultationen statt, bei denen
gemeinsame Sitzungen der Staatschefs und Minister erfolgen.
Verehrte Horerinnen und Horer in Nordkorea,
wie ware es denn, wenn es nach einem Friedensvertrag neben gemeinsamen
Gedenkveranstaltungen beider Koreas auch einen nordkoreanisch-sudkoreanischen
Freundschaftsvertrag gabe? Was die beiden Koreas betrifft, so konnte der Elysee-Vertrag ein
Muster fur eine vertragliche Grundlage eines solches Freundschaftsvertrages sein. Dieser
Vertrag zwischen den Koreas konnte alle moglichen Arten von Kooperationen begrunden, die
politisch gewollt und realistisch sind. Auf dem Gebiet der Kultur, des Sports, des
Umweltschutzes, der Medizin, ja ggf. sogar auf dem Gebiet der Sicherheitspolitik: Ware es
nicht denkbar, dass Nordkorea und Sudkorea eine gemeinsame Militareinheit fur Einsatze der
Vereinten Nationen zur Friedenssicherung, den beruhmten Blauhelm tragend, aufbauen?
Eine Aussohnung werden auch beide Koreas miteinander vornehmen mussen, wenn die
Regierung in Pjongjang es mit ihren Kooperationsangeboten uber den eigenen Machterhalt
hinaus wirklich ernst meinen sollte. Eine zwischen-koreanische Aussohnung wird den Korea-
Krieg und seine Menschenrechtsverletzungen, aber auch die andauernde Unterdruckung von
Menschen in Nordkorea, darunter die kwan-li-so-Lager, umfassen mussen. Denn ein Thema
der Deutsch-Franzosischen Aussohnung waren auch deutsche Kriegsverbrechen in Frankreich,
auch die der Geheimen Staatspolizei. Thema einer koreanisch-koreanischen Aussohnung
sollten daher auch das Leid des Korea-Krieges und die immer noch in Nordkorea bestehenden
politischen Straflager sowie die Arbeitsreformlager werden. Denn seit vielen Jahrzehnten
erfuhren viele Familien Nordkoreas Leid in diesen Lagern, egal, welchen Songbun-Status sie
hatten. Erst, wenn auch dieses Leid aufgearbeitet wird, ist meiner Ansicht nach eine

vertrauensvolle Kooperation zwischen den beiden Koreas denkbar. Das lehrt uns meiner
Meinung zufolge die Aussohnung zwischen Deutschland und Frankreich.
Verehrte Horerinnen und Horer in Nordkorea,
das war der Bericht aus Berlin in Deutschland fur den Monat Januar von Charles von
Denkowski, gesendet uber die Kurzwellenfrequenzen des North Korea Reform Radio.
Ich wunsche Ihnen und Ihren Familien einen schonen restlichen Winter.
Wir, die wir uns in Deutschland mit Nordkorea befassen, denken jeden Tag an Sie und
wunschen Ihnen und Ihren Familien eine harmonische Zukunft, in der auf der koreanischen
Halbinsel Kooperation vorherrscht, aber auch die Geltung aller Menschenrechte.
Sie horen mich im Monat Marz wieder hier auf dieser Kurzwellenfrequenz.
Anjeong Hykye-seo!


입력 : 2019-02-15 (조회 : 307)  |  북한개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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