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새 체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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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미씨가 그리운 친구 정희에게

방송일
2020-05-05
진행
시간

파랑새 체신소?

파랑새 체신소는 세대를 이어가며 가슴에 한으로만 남은 실향민, 탈북민들의 고향과 혈육에 대한 그리움을 북녘으로 전해 드립니다.
손 내밀면 지척인데 갈 수 없는 곳이어서 더 가슴 아픈 북한으로 뜨거운 눈물과 그리움을 담아 전하는 그 들의 사연을 신청자 본인들의 목소리로 직접 전해드립니다


<보고 싶은 친구 정희에게>

내 친구 정희야! 잘 지내니? 내가 남조선으로 온지도 벌써 10년이 훨씬 넘었는데 편지를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오늘에야 이렇게 편지를 써. 내가 남한으로 왔다는 것도 아마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 그리고 네가 얼마나 놀랐을지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이 편지를 라디오를 통해 꼭 들을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면서 편지를 쓰고 있어. 너와 나만 알 수 있는 소중한 추억들이니까 너는 이 편지를 들으면  편지를 보낸 친구가 바로 <나>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야.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상황이라 잘 지내는지 더 걱정이 되네. 북한 정권의 발표로는 코로나 감염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다면 기뻐할 일이지.
 정희야! 나는 너와 내가 처음 만났던 그때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 내가 혜산으로 처음 이사를 간 날 너랑 경숙이가 나보고 같이 놀자고 말을 걸었는데 길을 잃어버릴까 봐 겁나서 같이 안 놀겠다고 했지. 너희들이 막 웃으면서 다 놀고 우리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주마했는데도 나는 안 놀겠다고 고집을 쓰고 집으로 들어갔었지. 나중에 너희들한테도 얘기를 해줬지만 나는 6살 때 엄마를 잃어버리고 고아가 될 뻔 했던 무서운 기억이 있어서 그랬어. 이젠 몇 십 년이 지났는데도 가끔 한 번씩 그때 엄마가 나를 찾지 못했더라면 나는 영원히 고아로 살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지금도 너무 무서워. 그리고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면서 끝내 나를 찾아낸 우리 엄마가 지금도 눈물 나게 고마워.
내 경험으로 보면 어린 시절의 무서운 감정은 평생 잊혀 지지 않는 것 같아. 그 때의 무서운 기억 때문에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도 인파가 많은 공원이나 마트 같은데 갔다가 아이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항상 들어.
참, 내가 지금 너무 내 얘기만 하고 있네. 넌 어떻게 지내니?
지금도 대홍단에서 살고 있니? 자식은 몇 명이니? 난 여기 와서 딸 한 명을 더 낳아서 자녀가 둘이야.
마주 앉아 얘기를 할 수 없고 일방적으로 질문만 하고 답을 들을 수 없으니 참 슬프다. 우리는 서로의 집이 10미터도 안 되는 이웃인데다가 엄마가 같은 직장을 다녔고 또 우리 둘 다 너무나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는 불행을 겪다보니 서로가 더 친했던 것 같아.
너도 그렇겠지만 왠지 그렇게 많은 시간들이 흘렀건만 결혼하고 애 낳고 키우면서 세상을 떠난 엄마가 보고 싶을 때가 더 많아지는 것 같아. 특히 출산했을 때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남편 몰래 몇 번이나 울었었어.
우리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하루도 서로의 얼굴을 안 본 날이 없었다. 10년 넘는 세월동안 학교 갈 때도 항상 너희 집에 들러서 같이 가곤 했고 겨울에는 썰매를 같이 타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빨래도 하고 수영도 함께 했는데 이젠 다 소중한 추억이 되었네. 초등학교 때 너하고 싸우고 나선 너에게 줬던 색종이를 다시 달라고 했던 일이 생각나 웃음이 절로 난다.
그리고 이 얘기는 지금에 와서 처음 하는 건데 내가 너희 집에 들르면 너희 집이 식사 중일 때가 많았어. 그때 우리 집은 강냉이 밥을 먹었는데  너희 집 밥상엔 흰쌀과 잡곡이 섞인 밥에 기계떡이 들어있는 국이 있었어. 난 사실 그때 너희 집 밥이 너무 먹고 싶었는데 자존심 때문에 너한테 한 번도 얘기 안 했던 것 같아. 어린 나이에도 자존심이 그렇게 중요했나 봐.
 정희야! 네가 군대 갔다가 제대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내가 고기를 조금 사가지고 너희 집에서 밀가루로 직접 밀어서 면을 뽑아 짜장면을 해먹었던 기억이 나? 그 날 우리는 네가 군복무를 하느라 헤어져 지냈던 기간 동안 있었던 이야기도하고 네가 군복무를 할 때 사귀었던 옛 애인이 써준 연애편지를 나한테 보여줬어. 근데 얼마 안 지나 너한테 큰일이 닥쳤잖아.
 그 날로부터 얼마 안 되어 너는 한 남자와 선을 보았고 마음에 안 들어 다신 안 만난다고 했는데 아버지의 강요에 못 이겨 결국 결혼까지 했잖아.
역시나 인생이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아. 그 때 네가 내 앞에서 울면서 그 남자와 결혼하기 싫다고 했을 때 친구로서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속상했고 아버지 강요에 떠밀려 싫은 결혼을 하는 네가 답답하기도 했고 마음이 아팠어. 그렇게 대홍단으로 시집을 간 이후에 네가 혜산 부모님 댁에 내려왔을 때 우리 잠깐 만났었는데 결혼 전 늘씬하고 예쁘던 너의 너무나 달라진 모습에 놀랐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남편한테 사랑을 받으면서 잘 살고 있는 거지? 가끔 내 주변에도 마음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이 결혼하고 같이 살면서 사람의 진가를 알고는 정말로 행복하게 사는 부부도 있더라. 부디 네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기를 바랄 뿐이야.
나도 남편과 싸울 때도 많아. 하지만 또 아이들 손을 잡고 네 식구가 같이 놀러가거나 외식을 할 때면 이런 게 행복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 나는 가끔은 지금의 남편보다 더 이해심이 많고 배려해주는 남편을 만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도 하지만 내가 완벽한 여자가 못 되듯이 완벽한 남자도 없을 거라고 생각을 바꿔보면 한결 마음이 편해져. 생각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내 인생의 행복지수가 다르게 느껴진다는 걸 점점 깨닫는 것 같아.
 너에게 편지를 쓰면서 소중한 추억들을 떠올리니 너는 물론이고 친구들이 많이 보고 싶어. 나한테 사귀자고 고백했던 남자친구는 현재 어떻게 지내고 있고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보고 싶기도 하네.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고 참 착한 친구였는데 장가를 가서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열심히 살고 있겠지? 그 친구를 가끔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질 만큼 좋은 기억들만 있고 그 친구의 모든 일이 잘 되길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어.
아이가 둘이나 되는 40대 여자가 이런 얘기를 하니 너무 웃긴다고 생각할 수 도 있는데 그런 말도 있잖아. 나이 80이여도 마음은 20대랑 똑 같다는 말...나이가 들면서 내가 체험해보니 진짜 맞는 말이야. 학교 졸업할 당시 우리 마주 앉아 호감 있는 남자들 얘기, 싫다는데 계속 따라다니는 남자들 얘기를 하면서 수줍어하기도 하고 즐거워하던 소녀감성이 아직도 마음 깊은 곳에 남아있는 것 같은데 어느새 우리도 중년이 되었다니 참 슬프다.
나는 가끔 살면서 지치거나 우울하면 고등학교 때 즐거웠던 일들을 떠올리면서 기분전환을 하곤 해. 정말이지 그럴 수만 있다면 중고등학교를 다시 다니고 싶어. 여기 와서 대학도 다녔는데 대학동기들과 10년도 더 넘게 나이차이가 있어 같이 어울려 지내는 시간들이 별로 없다보니 북에서의 학창시절만큼 즐겁지 못했어.
어린 친구들과 경쟁해서 점수를 받아야 해서 밤새서 공부해야 했고 집에 들어와서는 또 아이를 돌봐야 하고 정말 대학 4년 동안 숨 가쁘게 살았던 것 같아. 여기는 거기랑 공부환경이 완전히 달라. 높은 성적을 받기위해 모두 잠을 줄이고 시간을 아껴가며 노력을 하고 그래서 경쟁이 너무 치열해. 난 고등학교 때도 공부는 자신이 있었고 제대로 된 경쟁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는데 여기 와서 해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힘들었던 것 같아. 공부와 집안 살림을 동시에 해야 해서 더 힘들었던 것 같아. 그런데다 30대중반에 공부를 다시 시작하니 머리가 어렸을 때 보다 못한 것 같더라. 그래도 정말 열심히 해서 대학을 성공적으로 졸업했고 덕분에 지금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괜찮은 월급을 받으면서 잘 살고 있어.
정희야! 어릴 적엔 몰랐는데 40대에 들어서니 참 건강만큼 중요한 건 없다는 걸 자주 깨닫는 것 같아. 아무리 돈이 많고 높은 권력을 가졌다 해도 몸이 아파 침대에 누워만 있어야 된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인 것 같아.
그래서 나는 요즘 운동도 하고 건강식품도 잘 챙겨먹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야. 여기도 삶이 만만치 않지만 거기는 생계를 위한 여자들의 삶이 참 고되잖아. 열심히 돈을 벌어 자식들과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엄마이기에 쉽지는 않지만 본인의 건강도 신경 써서 잘 관리해야 해. 아픈데 없이 잘 지내고 있어야 우리 만날 수 있을 거잖아. 기약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만나게 될 그날을 기대하면서 너도 나도 건강하게 잘 지내자! 만나지는 못하지만 이 친구가 항상 너와 너의 가족 모두에게 좋은 일들만 있기를 기원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말고 삶이 지치고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힘내서 잘 살아주길 바랄게~
아쉽지만 이젠 헤어질 시간이야.  안녕히 잘 지내~

 ~서울에서 너와 제일 친한 친구 영미가~

입력
20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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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개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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